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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i aber Einsam Apr 01. 2020

장미꽃을 그려보내던 아이

국선사건 영장실질심사때였다.

중국에서 엄마랑 살다가 한국으로 들어와 보이스피싱을 하다가 잡혀온 20대 남자였는데, 접견 도중

"엄마랑 중국에서 계속 살지 왜 돈 없이 한국에 와서 보이스피싱 한 거에요?"

라는 질문을 했더니, 접견실을 나가서는 의자를 발로 차고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엄마랑 중국에서 살지 한국에 왜 왔냐고?" 라며 난동을 부리는 것이었다.

접견실 옆에는 경찰이 수두룩 앉아 있고, 접견실은 투명해서 그 난동이 다 보이지만, 나한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 정도의 위협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볼 수 있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신경은 쓰였다.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피의자가 나가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다. 변호인 접견때와 재판장 앞에서의 태도가 다른 자들은 많으니 말이다.


기소가 되고, 피고인 접견을 갔을 때였다.

피고인과 변호인 사이에는 낮은 플라스틱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전부인데(요즘 코로나 이후, 칸막이가 더욱 높아졌다), 저 쪽 문앞에서 노크를 하는 것이었다. 변호인과 피고인은 출입하는 문이 다르고, 투명한 룸에서 접견을 하는데 노크하는 피고인은 처음이었다.

들어오시라고 했더니, 90도 인사를 하고는 "지난 번에는 죄송했습니다."라는 것이다.


이제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었다.

왠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얘기를 하다보니 피고인은 친어머니는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는데, 두 어머니 모두 중국인이었다. 아버지는 작년에 자살을 하셨다고 했다. 이후 의지할 곳이 없어 새어머니가 있는 중국에 찾아갔으나 피도 섞이지 않은 어머니의 가족들과 오래 지낼수 없어서 돌아오게 됬는데, 한국에 도착했을때 단돈 "2천 원"이 있었다고 한다.

신문지를 덮고 노숙을 하다가 배가 너무 고프고 살길이 막막해서 보이스피싱인 줄 알면서도 그 일을 하게 되었으나 그 일을 그만두고 본인도 자살 모임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는데 트위터에 남긴 글 덕에 경찰이 출동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말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스무 살이 넘었는데 기댈곳 없으면 스스로 마음 굳게 먹고 더 열심히 살아야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에요. 자살이라니. 약한소리나 하고"

라고 사실은 나도 감히 짐작할 수도 없을 상황 속의 그를 몰아부쳤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거 같다.

그랬더니, 덩치는 산만한 그 아이가 갑자기 큰소리로 엉엉 우는 것이 아닌가.


정말 난감했다.

여자변호사가 머리 빡빡깍은 젊고 등치 좋은 남자피고인과 접견을 하는데, 그 피고인이 꺼이꺼이 목놓아 줄줄 울고 있는 광경이라니.

옆 칸의 다른 피고인과 변호인들이 모두들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래, 내가 콱 때렸수. 핵 폭탄급 주먹으로 아무도 못보는 빛의 속도로 콱 때린거유. 나 무서운 사람이유"

라고 말하는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결국 그날은 그 아이가 눈물을 수습할때까지 기다려서 접견을 마쳤다.


며칠 후 구치소에서 편지가 왔다.

고모가 한 분 계신데, 자꾸 사고를 치니까 이제는 연락도 안받아주고 세상천지 기댈 곳이 없는데, 내가 그렇게 말을 하니, 왠지 자기를 걱정해주는 마음같아서 울컥했다는 것이다. 방으로 돌아가서도 진정이 안되서 하루일 울었다는 것이다. 그는 구치소에서 편지를 자주 보내왔다. 고맙다면서 장미꽃을 그려서 색칠까지 해서 보내오기도 하고, 글씨가 참 예뻣는데 이런저런 얘기들을 써보냈다.


가끔 구속 피고인들이 편지를 보내오곤 한다. 주로는 본인의 재판과 관련된 내용을 써보낸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감사의 편지가 온다. 국선 사건이 품은 많이 들면서도 소소한 감동이 있어서 그만두기가 힘들었다.

최후 변론을 하는데, 나도 너무나 마음이 쓰였던 피고인이라 성의껏 열심히 했다. 그 아이는 옆에서 또 줄줄 울고 있었다. 마음이 쓰였다. 결국 나도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왜 법정에서 그렇게 많이 울었냐. 마음안좋게."라고 시작해서, 내가 늦은 나이에 로스쿨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아빠가 해주신 말을 전해줬다.

"아빠, 나 너무 나이가 많이 들어서 변호사가 될 거 같은데, 그래선지 생각보다 로스쿨 입학이 안 기뻐."

"아니다. 사람은 관에 누울때까지 모른다. 죽을때 결국 변호사로 죽는건데, 언제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했냐 안했냐가 중요하지, 시기는 크게 안중요하다. 살아봐라."

그 당시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살면서 계속 되짚어 보는 말이었다.   

그 아이도 그렇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사건이 모두 종결이 되고, 그는 다른 교도소로 옮겨가게 되었다. 고모도 다시 연락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간간이 편지를 주고 받는다. 서로 안부를 전하면서 말이다.


오늘 출근을 해보니, 그 아이의 편지가 책상위에 놓여 있었다.

오늘도 그가 몸도 마음도 행복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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