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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Oct 06. 2023

만주 벌판 말 달리던

캘리포니아 그녀 31화

91


엊그제는 현관 손잡이까지 잡았다가 슬그머니 놓고 거리로 나왔어. 안에서 김철수의 목소리가 들렸거든. 한껏 들뜬 한 옥타브 높은 멜라니의 목소리도. 지난번처럼 괜한 감정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어. 그뿐만 아니라 지금 김철수를 마주하면 원장의 음흉한 계략에 나도 모르게 발을 들여놓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어.


유엔 사무국에 지원서 냈다는 정보를 원장이 어디서 얻은 것일까. 원장과 김철수의 껄끄러운 관계로 미루어보아 일부러 말하진 않았을 터이고 문화원이 늘봄식당에 프락치를 심어놓은 것도 아닐 텐데 내 머리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어쩌면 뉴욕에서 흘러들어온 소식일 수 있어. 만일 김철수가 유엔 사무국에서 일하게 된다면 문화원 앞길에서 원장이 아저씨에게 핏대 세우며 삿대질할 수 없을 거야.


원장은 자신이 관직에 있으므로 다스리는 쪽에 서 있다고 믿어. 비록 미국 국적이라 하더라도 양강도 혜산 출신이면서 식당업에 종사하는 평민인 아저씨는 다스림을 받아야만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 몹시 나쁜 생각이야. 수천 년 내려온 관직에 대한 유구한 우월의식을 비단 원장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야. 얼핏 본 영사님도 하다못해 팀장도 가지고 있으니까. 캘리포니아에서 그 정도이니 남쪽 한국 땅에선 오죽하겠어? 서류가 접수되었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탈락시켜야 한다는 불타는 의지를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거리는 늘 엉망진창이야. 길 건너편 블루 보틀이 눈에 들어왔어. 주머니 사정도 있고 해서 그냥 동네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어. 아파트는 슬럼가와 다운타운 중간에 있어 밤에는 외출하지 않는 게 좋아. 아직 오후 햇살이 남아 있어 안심하기로 했어. 사전전도 끝났고 영화제도 끝났어. 문화원에 가도 딱히 할 일은 없어. 청소일을 하는 라틴계 아주머니와 수다를 떨거나 멍한 표정으로 거리를 내려다보다가 언제 모가지 잘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짓눌려 몇 잔째인지도 모를 커피를 마셔.


어쩌면 원장이나 팀장이 아직 교육이 덜 되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어. 늘봄식당에 파견할 프락치로서의. 알 게 뭐야. 관직에 있으면 영혼까지도 세뇌할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모르지, 남쪽 한국의 애국심을 자극하면서. 길거리 농구 하는 아이들을 한참 구경하다가 공원까지 걸어가기로 했어. 한참 정신 놓고 걷다가 며칠 전에는 없던 사무실을 발견했어.


Diversity is our strength. Bigotry is their weakness. Men Make Up 97% Of Combat Deaths. It's Time To End The Combat Gap. He died for his country. Now it's her turn.


포스터를 읽었어. 사무실 안쪽에서 몇몇 젊은이가 상담을 받고 있었어. 멈춰 서서 안을 들여다보자 군복 입은 흑인 여자가 들어오라고 했어. 모병관이었어. 나는 그저 커피를 마시고 싶었어. 물론 블루 보틀의 원두커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미국 국적이 아니더라도 입대하고 몇 년 복무하면 시민권이 나오며 급여가 어떻고 운이 좋으면 남쪽 한국에 있는 미국 땅에서 근무할 수도 있다는 말들, 재수 없으면 중동이나 아프가니스탄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은 맨 나중에 했어.


안면인식장애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 며칠 생각해본다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어. 흑인 모병관은 당연하다며 팸플릿 몇 장을 손에 쥐여줬어. 커피는 매우 심심했어. 공원의 오후 게으른 햇살이 어깨를 간지럽혔어. 팸플릿을 봤어. 너희들의 군 생활이 떠올랐어. 미국에는 남쪽 한국 땅이 없어. 남쪽 한국에는 미국 땅이 있어. 면회 한 번 가보지 않았지만 사회에서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져 버려진 아이들처럼 생활했을 그 시간들의 속살은 잘 몰라.


물론 김용덕의 변화는 눈에 거슬려. 무적 해병 막강 해병 팔각모 사나이가 이념 과잉의 선두에 서서 정작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우겨대는 꼴들은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어. 그는 자신의 나라를 위해 숨졌고 이젠 그녀 차례라고? 흑인 모병관은 내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던 걸까. 아직 젊으니 선택할 것들이 여전히 많이 남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내 몸에 고여 있는 시간들을 몽땅 써버리고 난 뒤에 후회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싶은 걸까. 기회는 늘 오지 않는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하던 흑인 모병관의 확신에 찬 표정과 목소리가 왠지 슬픔을 자꾸만 게워내게 해. 맞아. 우리는 슬픈 민족이야. 슬픔은 강철보다 그 무엇보다 강해. 용기보다 더 오래 몸속에 남아 있고 더 오래 마음을 움직이게 해, 원장이 아무리 외면해도.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 걷기 시작했어. 김철수는 아직 아파트에 있을까? 걸음은 한없이 느려져, 스타카토로 끊어져.


92


밤새도록 엎치락뒤치락 깊은 잠을 자지 못했어. 누구를 이토록 걱정해본 적이 까마득해.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멜라니는 없었어, 김철수도. 파티가 끝난 뒤에 도착한 것 같은 아쉬움이 밀려들었지만 이미 예상한 터였고 호스트조차 없을 줄은 미처 짐작조차 할 수 없었어. 마중 갔겠거니, 단순하게 여겼어.


샤워하고 멜라니처럼 전신 거울 앞에서 한참 나를 바라보고 살펴보고 있을 때도 멜라니는 오지 않았어. 거뭇한 옹달샘은 언제나 항상 거기 있었어. 다소 마른 몸매와 좁은 어깨, 젖은 검은 머리카락과 가늘고 긴 다리, 찢어진 눈꼬리와 바짝 마른 검붉은 건포도 같은 젖꼭지. 인철수를 떠올린 것 같기도 하고 알프레드를 생각한 것 같기도 하고.


밤은 흔들림 없이 깊어 갔어. 멜라니는 오지 않았어. 전화하면 궁금증과 걱정을 쉽게 떨쳐버릴 수 있지만 김철수와 함께 있을 거라는 강한 추측에 기다림을 즐기기로 했어. 멜라니는 슬럼가와 가까운 아파트 앞 밤거리가 위험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어. 자정 가까이 되자 기다림은 더욱 절실해졌어. 피곤이 몰려와 침대에 홀로 누워 있으면서 이토록 절실함에 애가 타던 적이 있었나 더듬었어. 허쯔, 여진족의 후예. 그녀가 떠올랐어.


그랜드 캐니언 어느 후미진 골짜기 깊은 땅바닥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 믿어. 타일러는 무혐의로 결론 났어. 하지만 살아 있는 자들의 결론이야. 오직 허쯔만 알아. 찬란하게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허쯔는 만주 벌판 말 달리던 조상들을 기억해낼까? 사람은 죽어서도 산다는 걸 믿었을까? 깜빡 잠들었다가 금방 깨어났어. 멜라니는 돌아오지 않았어. 엎치락뒤치락.


한 무리의 사내들을 이끌고 허쯔는 눈 덮인 들판을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어. 허리춤에 찬 긴 칼과 어깨를 가로질러 맨 화살이 믿음직했어. 이윽고 말에서 내렸어. 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어. 사내들과 수군수군 얘기를 나눠.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한족(漢族) 마을이야. 허쯔의 신호로 사내들이 돌격했어. 기습당한 한족은 우왕좌왕했어.


금방 깨어났어. 거실로 나와 멜라니의 침실 문을 살며시 열었어. 텅 빈 침대. 창밖에는 흐린 가로등 몇 개만 어색하게 서 있었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유일한 법칙이야. 여진족의 말발굽에 마을은 엉망진창 난장판이야. 허쯔에게도 자비란 없어. 삭풍이 마을을 뒤덮었어. 하늘에서 굵은 눈발이 춤추며 내려오고 있었어.


가로등 하나는 끝내 고치지 않은 모양이야.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근위병처럼 가로등은 듬직했지만 이가 빠진 것처럼 하나가 꺼져 있어. 묘한 불협화음 같아. 한동안 어두운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숨쉬기가 얼마나 어렵던지! 몽유병의 걸음처럼 침대로 걸어갔어. 정신이 까무룩 수면 아래로 잠겼어.


집들이 불타오르고 굵은 눈발은 열기에 녹아 비처럼 내렸어. 빼앗긴 식량들을 되찾고 허쯔는 손짓했어. 사내들은 일사불란하게 마을을 빠져나왔어. 삭풍에 맞서 말들은 힘차게 눈 덮인 들판을 가로질러 갔어.


알람 소리에 얼른 일어났어. 집안은 더없이 고요했어. 낡은 냉장고에서 찬물 꺼내 마시면서 현관을 살폈어. 인기척은 없었어, 멜라니의 침실에서도. 희뿌옇게 창문은 밝아오고 부지런한 첫차의 엔진 소리가 쏜살같이 다가왔다 멀어졌어. 창문 밖으로 고개 내밀고 거리를 내려다보았어.


지난밤 내내 단단하게 쌓여 있던 어둠은 온데간데없고 하루가 또 시작되고 있었어. 그리운 건 너희들인데 안타까운 건 허쯔였나 봐. 꿈과 현실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어. 멜라니의 외박은 이미 익숙하지만 허쯔처럼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했던 걸까. 현관문 너머에서 들렸던 목소리는 틀림없이 김철수의 목소리였어. 애인을 집까지 데리고 왔을 때는 외박하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애인이야 위험하지 않지만 밤거리는 위험해. 여긴 캘리포니아야, 약탈과 방화의 유구한 역사가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는. 하지만 나는 애써 침착하기로 했어. 멜라니는 나보다 캘리포니아를 더 잘 알아. 사람들 속에 있어도 금방 찾아내지 못해. 누구도 쉽게 특정하지 못해. 숨은 그림이야. 그래서 허쯔보다 더욱 안전할 거야. 하지만 김철수는? 작은 불안감이 들지만 김철수는 적어도 남자이니 괜한 염려일 수 있어.


엷은 잠 속에서 허쯔보다 내가 더 말 달렸던 모양인지 끈적끈적해진 몸을 씻고 서둘러 출근 준비를 했어. 시리얼로 간단히 아침 해결하고 거리로 나왔어.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기 때문에 인내심이 필요했지. 한참 오랫동안 기다리던 버스에 올라타면서 정말 멜라니는 어디로 갔을까, 진심으로 걱정했어. 허쯔처럼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문화원으로 향해 버스는 거침없이 달려갔어. 이만,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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