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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Oct 06. 2023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44

“그렇기는 하네. 세대 차이가 있으니까.”


볼펜과 안경은 저희끼리 키득거렸다. 깻잎머리는 볼펜과 안경에게 눈을 흘겼지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20대 중반의 깻잎머리를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어디로 튈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출근도 9시 정각이 되어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퇴근도 업무가 남아 있든 말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볼펜과 안경은 그나마 내 눈치를 봐가며 퇴근하는데. 화성 물류센터의 분위기를 떠올려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출장 가셨던 일은 잘됐나요?”


볼펜이 물었다.


“잘 되고 말고가 어디 있어? 현지 분위기를 파악하는 건데. 본부장님께 보고하러 다녀올 테니, 일들 하라고. 참, 준비해놓으라고 했던 자료는?”


“여기 있습니다.”


안경이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나는 베트남에 있을 때, 이메일로 파일을 받아서 검토했다. PPT로 프레젠테이션하면 간단한 일인데, 본부장은 굳이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다. 내용은 요약해서 보고용 문서로 출력해야 했다. 두 번 일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본부장실로 갔다.


“고생했어. 베트남 상황은 어떤가?”


본부장은 서류를 건네받자마자 물었다.


“자료를 검토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몇 년 전, 베트남에 진출한 유통사업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임무였다. 대규모 쇼핑센터를 하노이와 다낭에 짓고 영업을 시작했지만, 매출에서 이익이 창출되지 않았다. 주 고객이 관광객인 데다가, 중국산 짝퉁 판매로 여러 차례 곤욕을 치른 뒤부터 매출은 추락을 거듭했다. 그렇다고 짝퉁을 판매했다며, 입점을 취소하면 공간만 놀릴 뿐이었다. 입점할 때 쓴 계약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나마 직영으로 운영하는 식품 쪽에서 간신히 이익을 내고 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입맛이 한국과 달라서였다. 게다가 서민들이 접근하기에 여러모로 불편했다.


“제 생각엔 소규모 상점의 형태로 유통구조를 재편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식품들도 한국 것들을 수입해서 그대로 판매하지 말고, 밀키트 형태로 베트남 입맛에 맞추는 상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밀키트? 예를 들면?”


“베트남의 육류 소비가 늘어나고 있는 건 아시죠?”


“사료를 수입한다는 말은 들었지.”


“가령, 삼겹살을 밀키트로 만들어서, 냉장 시설을 갖춘 소규모 상점에서, 그러니까 서민들이 접근하기 쉬운 장소에서 판매한다면 장기적으로 승부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겹살? 그게 될까?”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먹을 수 있도록 초벌구이해야겠죠.”


“아이디어는 좋지만, 먼저 대형쇼핑센터보다는 중소형으로 가자는 게 핵심이네.”


“그렇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던 초창기에 일을 너무 크게 벌여놔서….”


“상범이 놈이 저지른 짓이지. 나야 어쩔 수 없이 동의했던 것이고.”


“네?”


의아했다. 아무리 전략기획팀이라도 해도 일개 팀장이 베트남 사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나? 몇 년 전 저성과자로 몰려 화성 물류센터의 창고지기로 쫓겨 내려가기 전에, 베트남 진출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초기 투자의 위험성을 충분히 강조했지만, 닮은꼴 조 팀장은 내 보고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황이 작성한 보고서를 들고 회의에 참석했었다.


“며칠 뒤에 회장님하고 여러 임원이 모여 회의할 계획인데, 자네도 참석하게. 내가 회장님께 말씀을 올려서 그렇게 할 테니, 삼겹살뿐만 아니라, 다른 밀키트도 생각해보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장 팀장!”


본부장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표정이었다.


“얼마 전에 기사를 바꾸었는데, 자네 친구라고 하던데, 맞나?”


“불독이라고, 친구이긴 합니다만….”


내가 출장 간 사이 사고라도 쳤나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친구, 아주 물건이더구만. 착실하기도 하고. 알았네. 가보게.”


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부장실을 나와 기획팀으로 돌아가는 길에 총괄영업장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화성 물류센터 파트장을 보았다. 지난번에는 본부장실을 나오더니 이번에는 총괄영업장을 만났다고? 본사뿐만 아니라 화성까지도 본부장과 총괄영업장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파다할 터인데, 설마 양다리를 걸치고 있나? 파트장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상납하고 있나? 물론 추측이지만.


“또 만났네요. 잘 지냈습니까?”


파트장은 벙글벙글 웃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라도 보는 걸까? 소리 없는 웃음이 왠지 은밀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파트장은 자신의 비리를 둘만이 아는 비밀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듯했다.


“저야, 뭐 늘 똑같죠.”


“베트남에 출장을 갔다고 들었는데, 잘 다녀왔죠?"


어떻게 알았을까? 본사에 오면 이곳저곳 뻔질나게 쑤시고 다니는 모양인가? 하긴 내가 본사로 복귀할 거라는 얘기도 누군가에게서 귀동냥한 거겠지. 계장이 파트장의 소식통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 차량 부서 책임자가 인사 문제를 어떻게 알겠어?


“배탈이 나서 고생을 좀 했지만, 잘 다녀왔죠. 그런데 파트장님을 본사에서 자주 뵙니다.”


“업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곤 하죠.”


“눈치는 잘 지내나요?”


“그 친구, 잘 지내지요. 이혼한 걸 빼면.”


“네? 이혼했다고요?”


“와이프가 유산하고 나서, 갑자기 사이가 틀어졌나 봅니다. 나야,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어도, 유산과 이혼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나저나, 장 팀장은 결혼하지 않나요?”


파트장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눈치와 검수의 아슬아슬한 연애를 내가 눈치챌 정도면 파트장은 당연히 알 수 있을 터였다. 직원 모두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쥐락펴락하는 파트장의 성격으로 보아서도 모른다고 하면 더 이상했다. 그런데 말머리를 돌려? 눈치의 이혼이 파트장의 허물도 아닌데, 굳이? 설마 사이비 교주처럼, 백백교 교주처럼 신도들의 생사여탈권마저 거머쥐고 있다고 보면, 너무 앞서 나간 걸까? 일제강점기도 아닌데? 하긴 여기저기에서 스스로 친일파라고 고해성사하는 국민의 종들을 보자니, 친일해야 애국자가 되는 구한말을 영락없이 빼다 박긴 했지만.


“이제 겨우 삼십 대 중반인데요.”


“내가 그 나이 때는 벌써 둘째까지 봤어요. 자식이 늦으면 늘그막에 생고생해요.”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것보단 늘그막 고생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어른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파트장은 에둘러 말했다. 창고지기 장 대리가 아니라 전략기획팀의 장 팀장임을 확실히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파트장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내가 파트장의 모가지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하고 싶어졌다.


“요즘도 여전히, 당연히 밑장빼기를 합니까?”


“무슨…, 화투 해본 지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파트장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능글맞게 말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를 거야? <밑장빼기>가 무슨 뜻인지.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고 싶었으나, 저만치서 박 주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파트장님! 안녕하십니까? 내가 외근할 때만 오시더니 오늘은 여기서 만났네요.”


“아이고, 박 팀장…, 아니 박 주임이 아니신가? 회사에서 보니 새롭습니다.”


뭐야? 둘이 이미 아는 사이였어? 무의식적으로 박 주임을 팀장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내가 창고지기로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로 보이는데? 파트장의 본사 소식통이 계장이 아니라 박 주임이었어? 그동안 둘 사이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박 주임은 파트장을 통해서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 팀장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 주임은 비굴하게 웃었다.

  

“이제는 영업팀 업무도 빠삭하겠어?”


박 주임이 한걸음에 달려와 굳이 인사까지 하는데, 못 본 척 무시할 수 없었다. 뭐라도 반응을 보여줘야 했다.


“그럼요. 장 팀장님."


박 주임은 넉살 좋게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파트장님하곤 일찌감치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나는 지레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넌지시 물었다.


“뭐, 오다가다 자주 만납니다.”


박 주임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 박 주임하곤 이웃사촌이지요.”


파트장이 덧붙였다. 그렇구나! 눈치의 이혼도 뜻밖이지만, 박 주임과 파트장이 이웃사촌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예상 밖이었다. 있는 말 없는 말 모조리 꺼내 들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을 박 주임을 상상해보면, 충분히 본사 소식통 노릇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평소에 입 무거운 파트장은 내내 듣기만 했을 것이고.


“파트장님! 밑장빼기는 화투판에서 손모가지 걸고 하는 겁니다.”


나는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밑장빼기요? …에이, 요즘 누가 화투를 친다고요? 포커면 몰라도.”


박 주임은 뜬금없는 말이라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장 팀장님도 참, 박 주임 말처럼 요즘 누가 화투를 친다고…, 농담치곤 썰렁합니다. 그렇지? 박 주임!”


“암요.”


박 주임은 파트장의 비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리 이웃사촌이라고 하더라도 파트장이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의리나 도의는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손톱 밑에 낀 때보다도 없는 박 주임의 성향을 파트장이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을 터였다. 어쩌면 저성과자로 몰아붙일 무렵에, 그리고 화성 창고지기로 쫓겨날 무렵에 이미 파트장에게 나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십중팔구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


“미국에 다녀왔다.”


도일은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한 마디 내뱉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미국이라니? 동남아 애들이 미국으로 튀었다는 거냐? 무슨 말이야?”


불독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모르겠구나. 백호와 닮은꼴이 있는데, 내 생각엔 쌍둥이 같아.”


“백호 부모를 찾았다는 거냐? 미국에서 살아?”


불독은 호기심을 참지 못해 서둘러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쓸데없는 소리! 넌 지치지도 않냐?”


도일에게 핀잔을 주었다.


“지치는 게 문제냐? 부모를 찾는 일인데, 도일이가 적극적으로 나서니 고맙다고 해야 하지 않냐?”


불독은 오히려 내게 싫은 소리를 했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불독이라, 당연했다. 도일의 뻘짓이나 불독의 쓸데없는 호기심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쌍둥이를 만나봤어?”


불독은 두 눈을 반짝거렸다. 도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누구냐? 대한민국 어디에 숨어 있어도 반드시 찾아내는 사람이 아니냐?”


“만나서, 잃어버린 형제가 있다고 물어봤어?”


나는 도일과 불독의 대화가 귀에 거슬렸다. 기껏 만나자고 해놓고, 이미 끝난 얘기를 어떻게든 이어보려는 도일의 헛짓이 빤히 보였다.


“그걸 어떻게 대놓고 물어보냐? 쌍둥이가 백호를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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