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를 알아? 백호야! 도일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 난 도통 모르겠다. 쌍둥이가 백호를 알면, 백호가 직접 부딪쳐서 확인하면 될 일인데, 도일은 왜 나서서 미국까지 갔다 오고 그러냐?”
불독은 도저히 영문조차 알 수 없다는 말투였다.
“조 팀장이라고, 예전에 전략기획팀 팀장이었어. 지금은 엘에이에 가 있는 모양인가 봐.”
불독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셋 중에서 유일하게 부모의 흔적조차 없어서, 불독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함으로.
“그러니까, 직장 상사였단 얘기네? 당연히 얼굴을 마주쳤을 테고, 쌍둥이인지 확인해봤어?”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아무 상관이 없어. 쌍둥이가 아니라 도플갱어야.”
단번에 불독의 호기심을 꺾어놓아야 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회사에 내 출생의 비밀이 퍼지기 시작하면, 평판이 형편없이 꼬꾸라질 것은 뻔하고, 저성과자로 몰릴 때보다 더한 곤욕을 치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독은 도플갱어라는 말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서도 내 얘긴 하지 마라. 특히 동료 기사에게도. 계장에게도.”
나는 불독의 눈을 쏘아보며 다짐하라고 종용했다.
“내가 바보냐? 네 얘기를 꺼내면 내 얘기도 할 수밖에 없는데, 미쳤다고 꺼내? 그나저나, 좋다 말았겠네? 가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을 테니….”
불독은 오히려 나는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아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미국까지 가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허튼짓을 그제야 감 잡은 불독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도일을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이런 말 들어봤냐? 회귀! 인생 2회차!”
도일은 자신만만했다.
“무슨 뜻이야?”
불독이 물었다.
“장 팀장이 조 팀장이 되는 거지.”
도일의 말에 불독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바꿔치기하자는 거야? 그게 가능한 일이야?”
“연구를 좀 했지. 미국은 넓어. 사람 하나 실종시키는 데 아무 문제가 없어. 필라델피아 켄싱턴 좀비라고 들어봤어?”
“좀비?”
“사전 답사까지 해왔어. 딜러 몇 명도 구슬려놨고. 문제는 백호가 내 계획에 찬성하느냐, 마느냐에 달렸지. 백호 스스로 도플갱어라고 인정했을 만큼 닮은꼴이니까.”
도일은 다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대충 들어도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전에 보육원 원장의 아들이 약쟁이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앞뒤를 충분히 넘겨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길바닥 생활을 했던 불독은 뜻밖의 말에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럴 순 없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도일의 계획을 대충 눈치챈 불독은 입가에 묘한 떨림을 흘렸다.
“불가능해. 늙은 회장은 눈치채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엄마는 아들을 단박에 구별할 수 있어.”
닮은꼴 조 팀장이 비록 유혹에 못 이겨 스스로 페닐렌에 빠져든다고 해도, 그런 환경을 자연스럽게 만들고, 등 떠미는 것은 범죄와 다름없었다.
“예전에 한남동 으리으리한 집 얘기를 했지?”
“했지.”
“잠복했던 것도?”
“열흘인가 했다면서?”
“중년 여자도 꺼냈겠네?”
“그랬던 거, 같고.”
“엊그제 확인해보니, 가사도우미였어. 물론 조 팀장의 엄마는 죽었어. 동사무소 직원한테 푼돈 얼마를 찔러주니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주더라. 그 넓은 집에 노인네와 조 팀장, 그리고 중년 여자만 살아. 따라서 백호가 들통날 일은 없다는 거지.”
도일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가족을 찾을 수 없다면, 만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네.”
불독은 생각을 바꿔 맞장구쳤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한 계획 따위는 없었다.
“그 노인네가 지금 네가 다니는 회사의 오너라는 거, 몰랐지?”
도일은 빙그레 웃었다. 닮은꼴 조 팀장이 회장 늙은이의 아들이었다? 본부장을 통해서 막연히 친인척이라고 짐작하기는 했지만, 아들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닮은꼴 조 팀장과 기 싸움에서 번번이 본부장이 밀렸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봐. 평생 고아로 살 거야? 비빌 언덕 하나 없이 외롭게? 네가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물론 나와 불독도 덕을 조금 볼 거고.”
도일의 계획은 말 그대로 인생 2회차를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쪽이 여전히 찜찜했다. 파트장의 비리가 사무실 직원 모두의 공범으로 감춰져 있는 것처럼, 도일은 바로 그런 작당을 하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닮은꼴 조 팀장을 약쟁이로 만들어 켄싱턴 어느 골목을 좀비로 걸어 다니게 하고서, 내가 조 팀장이 된다? 신분을 훔치는 것뿐만 아니라,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 되어 기업을 물려받는다?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한가를 떠나, 지금껏 백호로 살아온 나의 아이덴티티는 어쩔 것인가? 고아이고, 가난하다고 헌신짝처럼 내팽개친다고? 선뜻 내키지 않았다.
“장 팀장이 조 팀장이 되어도 여전히 장 팀장인 거야. 가면 하나를 쓰는 것뿐이야.”
복잡하게 헝클어지는 내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이 도일은 설득이라도 하겠다는 말투였다.
“내가 면접을 볼 때, 백호가 친구라고 당당하게 밝혔잖아?”
불독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총무팀장은 물론이고 본부장한테까지 알려졌더라고.”
“그래서?”
“장 팀장이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증인이 될 수 있지. 내가.”
“둘이 작당했어? 지금?”
여전히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도일의 엉뚱하기 짝이 없는 계획을 듣자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듣다 보니 단단히 작정까지 한 모양이라 난감했다. 장난삼아 떠드는 것쯤으로 처음부터 짓뭉개버렸다면, 얘기가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을 터였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도일은 제풀에 신바람이 나서, 계획에 불과한 일들이 이미 현실이 된 것처럼 흐뭇해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얘긴 아니야. 곰곰이 이것저것 따져보란 말이야. 이런 기회는 네 인생에 다신 없을 거야. 막말로, 보육원에 버려졌던 것도 억울한데, 이런 기회에 팔자를 고치란 얘기야. 쌍둥이가 됐건, 도플갱어이건 간에, 이건 천운이야.”
도일은 자신의 계획이 불독에게 먹혀들어 간다는 판단으로 살짝 흥분했다. 눈앞에 느닷없이 파라다이스가 펼쳐진 것처럼 감격스러운 표정까지 지었다. 뜬구름 잡는 얘기지, 그게 어디 쉽겠냐? 나는 말하지 못하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어떤 연놈들은 태어나보니 공주고, 왕자고, 재벌집 아들이고. 인생을 날로 회 처먹는 그런 무임승차자들에 비하면, 나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나? 애초부터 출발선 자체가 달라서 맞닥뜨려야 하는 온갖 고충들이 떠올랐다. 보육원 원장의 마리오네트에 불과했던 때며, 점심시간마다 수돗가 수도꼭지를 입으로 틀어막고 허기진 배를 채웠던 순간들이며, 등록금을 위해 오뉴월 땡볕 아래에서 막노동했던 시간이며, 저성과자로 내몰려 창고지기로 전락했던 일들이며….
“학력 위조가 유행이었잖아? 아니,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포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다못해 성형수술까지 해서 얼굴을 바꿔서. 검사도 권력층이라며 찰싹 달라붙어서.”
도일은 진심이었다. 불독은 뒤늦게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고아들만이 느끼는 기성 사회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 의식을 공유한 탓이었다. 그러한 저항 의식은 아직 무림의 세계가 얼마나 잔혹한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생겨났다. 아무튼 부모 찬스보다 더 지독한 것은 흑마술을 비롯한 온갖 제도들 역시 무임승차자들에게 맞춰져 있으니, 한번 가난은 영원히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런데 나라를 팔아먹지 않고도, 빛고을을 짓밟지 않아도, 일거에, 순식간에 판을 뒤집어버린다? 달콤하고 강력한 유혹이었다.
“내가 대기업 아들이 되는 게, 어디 쉽겠냐?”
“쉽다고 얘기하지 않았어. 계획을 세웠지만 아직은 엉성하거든. 그러나, 아까도 얘기했지만, 문제는 네가 동의하는 거야. 인생 뭐, 있냐? 한 방이라고. 네가 백호라는 그따위 정체성이 뭐가 중요해? 개나 줘버려! 더구나 고아인데, 미련이 남아?”
도일은 흔들리는 내 속내를 읽어내곤 자신만만해했다. 고아라면 누구나 고아라는 정체성에 애증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저주하지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지금까지 스스로 홀로 살아남았다는 자존감은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지금처럼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섰다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백호야, 이건 하늘의 뜻이야. 난 친구로서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불독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라도 하듯이 이를 악다물었다. 표정에서 비장미까지 느껴졌다. 가난과 혼자라는 외로움이 뼈에 박혀있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단번에 청산하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불독의 독촉이었다.
“엉성한 계획은 뭔데?”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도일에게 물었다.
“먼저 네가 죽는 거야. 심정지에 필요한 약을 준비했거든. 의사도 깜박 속을 수밖에 없어. 사망진단서를 받고 장례를 치르는 거지. 물론 가족을 연기할 사람들을 수소문해야 하고. 장례식이 끝나고 화장터로 가는 거지. 장례식장에서 회사 사람들을 맞이하는 불독도 연기를 잘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 넌 감쪽같이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지.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는 거야. 나는 미리 건너가서 사전 작업을 해야 하고. 아까 말하지 않았지만, 조 팀장과 안면을 텄어. 같이 켄싱턴으로 가는 거야. 딜러를 수소문해놨으니 약쟁이로 만드는 건, 순식간이거든. 누구도 페닐렌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어.”
불독은 이미 도일의 얘기에 푹 빠져있었다.
“문제는 또 있어. 엘에이 지사에 깍쟁이가 있는데, 조상범의 여동생이야. 물론 어릴 때부터 유학해서 오빠인 조 팀장을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거든. 더구나 여자의 촉이란 게 있잖아? 그리고 본부장을 알지?”
도일은 막힘이 없었다.
“어디까지 조사한 거야?”
엉성한 계획이라더니 도일의 치밀함이 예상 밖이라, 나는 혀를 내둘렀다.
“지금까지 갈고 닦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했지. 동남아 애들 잡으러 다니는 거, 그거, 아무나 못 한다. 아무튼 본부장을 조심해야 해. 회장의 가신이거든. 회장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틈을 노리고 있어. 언제든지 주군을 향해 칼을 들이밀 교활한 놈이야.”
불독의 취업을 부러워하던 도일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못난 놈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환경을 바꿔보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물론 계획대로 현실이 굴러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리고, 그 도박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