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하겠다고 결정하면 우리 셋은 의형제를 맺는 거야. 물론 지금도 형제처럼 서로 숨기는 것들 없이 지내지만, 같이 살고, 같이 죽는 진짜 의형제가 되어야만 천하를 얻을 수 있어.”
불독은 이미 도일의 말빨에 홀라당 넘어갔다. 당장이라도 도원결의를 하겠다는 도일의 말에 불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백호야! 이건 네 팔자만 고치는 게 아니라, 우리 셋 모두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면접 볼 때, 네가 서슴없이 나를 친구라고 당당히 나섰던 것처럼 결단을 내려.”
불독이 재촉했다. 도일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계획에 감탄하고 있었다. 말처럼 현실이 굴러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무수한 복병이 있을 거라는 짐작은 당연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복병을 날마다 만나면서 대한민국 우두머리 여자가 된 사람을 떠올려보면, 도일의 계획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데, 거기에 엉망진창이 하나 더 덧붙여진들 무슨 표시가 나겠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자만이 강자가 되는 세상이 아닌가?
“시간을 좀 줘. 죽어야 하는데, 주변을 정리해야 하지 않냐?”
나는 확실히 구미가 당겼다. 애들 장난질이라며 도일의 계획을 무시하고 콧방귀를 뀐다면, 앞으로의 인생도 불 보듯 빤했다. 무엇보다 부모에게서 버려진 고아라는 멍에에 짓눌려 평생을 그럭저럭 외롭게 살아갈 것이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야. 잘 판단해라.”
불독은 나를 다그쳤다.
“알았어. 이것저것 생각 좀 해보고 결정하지.”
“그래라. 아무리 늦어도 빠른 결정이 될 거니까.”
도일은 그제야 속 시원한 듯,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표정이었다.
*
도일과 불독의 반협박에 가까운 당부를 연거푸 듣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면서 버스 차창 밖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거리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휴일의 따스한 햇볕이 차창을 뚫고 들어와 무르팍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애벌레처럼 햇볕이 꼼지락거렸다. 간지러웠다. 머리를 비울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정확하게 몇 살 때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형들과 누나들이 모두 학교에 간 늦은 아침이었다. 보육원 마당 한 구석에 앉아 흙장난하고 있었다. 혼자였는지, 또래와 함께 있었는지 기억에 없었다. 한참을 퍼질러 앉아 돌멩이 덤프트럭에 흙을 잔뜩 싣고 운전했다. 그때 보육원으로 들어선 눈에 익은 아저씨와 아줌마. 꼬맹이였던 나는 그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다. 아저씨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고, 아주머니는 차가운 눈빛으로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그래도 여자아이가 부담이 없어요.
아주머니가 말했고 아저씨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서너 번 보육원에 왔던 터라 나는 그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한참 후에 그들이 다시 보육원 마당에 나타날 때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주근깨투성이인 수줍음 많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근깨와 얼마나 친하게 지냈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원장이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고, 주근깨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와 함께 보육원을 떠났다.
나는 여전히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돌멩이 덤프트럭을 한 손에 쥐고, 입으로 엔진 소리를 내며 운전했다. 분명한 기억일지는 알 수 없지만, 주근깨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상실감을 느꼈다. 무르팍에 옹기종기 모여드는 햇살이 성가셨다. 운전을 그만두고, 손바닥으로 햇볕을 쫓아내려 툭툭 쳤다. 햇볕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백호야, 바람이 차다. 그만 놀고 안으로 들어가야지. 너도 어서 선택받아야 하는데. 이때를 놓치면, 독립할 때까지 여기서 살아야 하잖니.”
원장이 말했는지, 다른 누구인지 기억에 없었다. 마당에 혼자 남게 되자 주근깨가 떠난 정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주근깨를 볼 수 없다는 상실감보다 무르팍에 몰려드는 햇볕이 더욱 성가셨다. 한참을 손바닥으로 햇볕을 쫓아내려 하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동네로 들어섰다. 마음은 이미 쓸쓸해져 걸음걸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일의 계획이 마치 동화 속,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남아 있었다. 실현 가능성은 둘째치고, 녀석의 화려한 말빨에 깜박 속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완벽한 계획이란 애당초 있을 수 없었다.
“아저씨!”
나는 터덜터덜 걸으면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놀이터에서 나를 향해 뛰어오면서 소리치는 꼬마가 보였다. 솟을대문의 그 꼬마였다. 그동안 열댓 번은 더 동네 골목을 이 잡듯이 훑었지만, 어디에서도 솟을대문을 찾을 수 없었다. 전략기획팀 팀장으로 인사발령이 나던 날, 솟을대문을 찾다가 끝내 발견하지 못해 은근히 부아가 오를 대로 올랐었다.
막연하지만, 무엇인가 내 삶에 개입하는 듯한 느낌에 빠져있던 무렵이었다. 세상의 온갖 논리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의 이해 지평을 뛰어넘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기괴한 실험이라도 한다는 망상이 들 정도였다. 말하자면, 세상은 홀로그램이어서 개인의 의지가 개입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미 2,000년 전에 한 사내가 사막을 건너 홀연히 나타나 신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면서, <똑바로 살아라, 인간들아!> 꾸짖고 난 뒤에도 탐욕과 욕정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는가.
“너, 참, 오랜만이다.”
“따라오세요.”
꼬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 쳐다보곤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솟을대문이 왜 보이지 않았느냐고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꼬마는 씩씩하게 앞서 걸었다. 뒤따라 걷는 것이 마땅찮아 옆에서 나란히 걸은 속셈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아무리 재게 발걸음을 옮겨도 꼬마와의 거리를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꼬마야, 같이 가자. 좀 천천히 걸어!”
“말이 많네!”
꼬마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지만, 분명 들렸다. 어른한테 하는 말치곤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꼬마는 눈에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솟을대문을 찾기 위해 수십 번 정도는 충분히 들락거렸던 골목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분명 라면 상자 골판지 정도인 꼬마의 등짝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게 아닌가. 마치 물을 잔뜩 머금어 축 늘어지듯. 등짝이 부풀어 오르면서 덩달아 키도 차츰 커졌다. 코앞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일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귀신에 홀린 기분에 휩싸였다. 이윽고 순식간에 훌쩍 커버린 꼬마가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뒤돌아서는데, 꼬마는 온데간데없고, 노인이 서 있었다.
“어서 들어가지. 젊은이.”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숱하게 찾아 헤맸던 솟을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천천히 대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쪽에서 안개 같은 희뿌연 천들이, 바람도 없는데 펄럭거렸다.
“들어오지 않고 뭐해!”
노인이 호통쳤다.
“들어갑니다.”
나는 솟을대문 안쪽으로 성큼 발을 들어놓았다. 눈앞을 가로막던 안개 같은 희뿌연 천들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넓은 마당이 나타났다. 마당 한 귀퉁이에 정자와 연못이 있었다. 예전에 보았던 풍경 그대로였다. 노인은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마루로 올라갔다. 자석이 이끌리듯 노인을 따라 대청마루에 올라섰다. 뒤뜰에서 솔 냄새 가득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도시의 바람이 아니었다.
“살림살이 형편이 나아진 것 같군.”
노인은 다관의 손잡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살림살이요?”
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로 되물었다.
“사는 형편 말이네.”
노인은 찻잔에 녹차를 따랐다. 그동안 숱하게 찾았음에도 솟을대문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묻고 싶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 모금 마신 녹차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거대한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이 밀려왔다. 찰나였다. 통증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금세 속이 편해졌다. 꼬마의 등짝이 이윽고 노인의 등짝이 되는 것처럼 신통방통했다.
“꼬마가 어르신이었나요?”
“글쎄…, 그렇게 보았다면 그렇고.”
노인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노인의 깊은 눈에 홀리기라도 한 듯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자의식이 모든 걸 망쳐! 어서 마저 마시게.”
노인은 찻잔을 가리켰다. 거역할 수 없는 절대명령처럼 들려왔다. 목구멍 안으로 밀려 내려가는 녹차는 미지근했고, 텁텁했다. 통증 대신, 기억할 수 없는 장면 하나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늦가을 깊은 밤이었다. 후줄근한 포대기에 꽁꽁 싸맨 핏덩이가 꿈틀거렸다. 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림자 없는 발걸음이 멈췄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커다란 눈동자와 홀쭉한 볼살이 사방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다른 발걸음도 발걸음 옆에 멈췄다. 여기라면 맡아줄 거야. 다른 발걸음이 말했다. 어떡해…, 다신 못 보는데. 발걸음이 울먹거렸다.
TV 화면이 꺼지듯 순간적으로 암흑이 되더니 천천히 다시 밝아졌다. 창문 밖에서 서서히 여명이 몰려오고 있었다. 속싸개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눈앞에서 모빌이 천천히 돌고 있었다. 구름과 비행기와 해님이 손짓했다. 그 옆으로 밝게 웃는 얼굴 하나. 보조개가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밝은 얼굴 옆으로 여전히 졸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짙은 눈썹이 나타났다. 녀석, 씩씩하게 울더니. 짙은 눈썹이 말했다. 그렇게 좋아요? 밝은 얼굴이 말했다. 당연하지. 내 뒤를 이을 사내놈인데. 짙은 눈썹이 말했다. 휴일인데, 출근할 거예요? 이제 막 사업에서 재미 보기 시작했데, 가야지. 눈코 뜰 새 없어. 눈 위에서 모빌이 천천히 움직였다. 구름과 비행기와 해님이 손짓했다. 창밖은 완연히 밝아져 나무 잎사귀 끝에 맺혀있던 이슬방울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정신이 드나?”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신이 들다니? 무슨 소리인가 싶어, 노인을 쳐다보았다. 인화에 실패한 흑백사진처럼 흐릿한 장면을 떠올렸을 뿐인데.
“한 시간이나 정신을 놓았어. 기억에 없지?”
“한 시간씩이나요?”
노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로 머릿속은 흐리멍덩해졌다.
“됐어. 때가 됐어.”
노인은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