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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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 P에게 인터뷰를 요청할 수 없었다. 법으로 따진다면 북부 노동지청에서 노조 설립을 위한 서류를 받아줘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녀석은 아직 모른다. 번동 오거리에서 한껏 축 처진 어깨로 버스를 기다리는 녀석을 그냥 보냈다.
지청장은 자신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불철주야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침을 튀기면서 떠들었지만 실은 철밥통 공무원에 지나지 않았다. 기사 작성을 위해 여러 사례를 검토하는데 지청장은 걸핏하면 참견이었다. 일간지처럼 영향력은 없지만 나름 법률 전문지여서 지청장은 좋은 홍보 거리를 갖게 된다는 흥분에 들떠 있었다. P의 무턱대고 덤벼드는 무모함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부러운 건 처음이었다. 삶은 이것저것 눈치 보거나 따지지 않고 달려들어야 제맛이 아닐까.
얼음보다 차갑던 정기자가 느닷없이 전화했다. 만나자고? K도 그렇지만 여자는 알다가도 모를 존재다. 관심 없다고 말하려는데 느닷없이 '김단야 알아요?' 하고선 나랑 밀당이라도 하려는 듯 전화를 먼저 끊었다. 뭐지? 이 신호는?
국장이 좋은 기사라며 칭찬을 했다. 듣고 보니 몇몇 지인에게서 전화를 받은 모양이다.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도록 윤활유 역할을 신문이 해야 한다며 가장 훌륭한 본보기가 내 기사라며 한껏 추켜세웠다. 자고로 여론은 만드는 것이라는 평소의 지론에 조금도 어긋남 없는 말들을 떠벌렸다. 내 기사가 나에게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러나 국장은 더없이 만족한다. 돈이 깡패다.
유아교육학과. 사무실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거듭 얘기했지만 여동생은 막무가내다. 비록 뒤늦은 공부지만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오빠는 오빠 일이나 제대로 챙기라고 오히려 핀잔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동생도 흐릿하게나마 가족사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는 핏줄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맞닥뜨릴 때까지는 열심히 살아보려는 안간힘. 아버지의 객사는 동생에게도 더없는 상처인 모양이다. 은행 빚내더라도 이 동네를 벗어나야겠다. 청학리 시내로 이사해야겠다. 그러면 오며 가며 만나는 죽음의 현장을 보지 않아도 될 터이니.
정기자와 장욱진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였을까. 바닥 좁고 오지랖 넓은 장욱진이 나에 대해서 뭐라 지껄였는지 모르겠지만 느닷없는 정기자의 적극적인 들이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추측이지만 프락치라며 손가락질하던 과거가 얼마나 잘못된 정보에 의지했는지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기자를 부추길 이유가 없다. 마음에 빚이라도 갚겠다는 건가. 하지만 어쩌면 나는 여전히 국장에게 칭찬받는 프락치다.
기형적인 시스템을 완벽한 사회 시스템으로 인식하게끔 조작질하는 프락치다, 나는 알지만 너희들은 모르는.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또 김단야 얘기다. 박헌영의 친구이자 주세죽의 두 번째 남편. 정기자의 말에 따르면 배포 큰 남자라고 하는데 믿지 않는다. 수천 년 북방 오랑캐도 왜놈들 노략질에도 반만년 지켜온 나다. 몸은 죽더라도 순결한 땅은 쪽발이 너희들의 것이 될 수 없다. 뭐, 그러면서 고문당했다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구라를 치더라도 좀 그럴듯하게 하면 어디가 덧나나.
K가 이 땅을 떠난 것도 나 때문이 아닐까. 물론 그러길 바라는 내 마음이 더 간절하다. 사실 P를 희생양 삼아야 한다는 얘기도 K가 먼저 얘기하지 않았나. 돌아보면 나는 K에게 길들임을 당하지 않았나. 그러나 유쾌한 더없이 기쁜 길들임이었다. K의 검붉은 젖꼭지가 사무치도록 그립다. 왜 아쉬운 것들은 과거에만 있는지 모를 일이다.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야 할 것들이 왜 과거에만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이런 식으로 늙어가는 걸까. 하긴 나라고 별수 있겠어? 하루가 멀다고 정기자가 또 전화질이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주세죽에 온 정신이 꽂혀 노래를 부르더니 갑자기 김단야로 옮겨갔다. 한사코 퇴근 후에 만나자고 앙탈이다. 또 모텔로 끌려갈지도 모르겠다.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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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리 읍내에 작은 빌라 전세를 구했다. 직장인 대출은 까다로웠다. 오래 묵은 나무 냄새,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는 처량하고 구슬픈 빗소리를 맡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될 터이지만 지금껏 살아온 집을 떠난다는 마음이 착잡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늦게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법률 자문을 구하는 줄 알고 심드렁하게 받았다. 잡았습니다. 무슨 소린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웅성웅성 전화기 너머에서 고함지르는 사내들의 거친 목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살인범을 잡았습니다. 그제야 2년 넘게 나를 옥죄던 긴장 하나가 딱, 끊어졌다. 무릎에서 힘이 빠지고 눈이 풀렸다. 눈뭉치처럼 단단하게 뭉쳐 얼어 있던 응어리 하나가 솜사탕처럼 물에 녹았다. 외지인이더군요. 지금껏 동네 건달로 알고 있었는데 뜻밖이었다. 급한 용무가 생겨 만날 수 없다고 하자 정기자는 다소 맥이 빠진 목소리였다. 사흘 연속으로 만났는데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경찰서 유치장에 홀로 앉아 있는 사내는 평범한 얼굴에 몸집은 왜소하기까지 했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묻지 마 살인입니다.
형사의 답변에 어이가 없었다. 생판 낯선 평범한 사내가 괴물처럼 보였다. 얼굴 어디에서도 참회의 한 가닥 흐린 빛조차 없었다. 마치 꿈꾸는 듯 아련한 표정. 형기는 대략? 10년 언저리일 겁니다. 아시잖아요? 우발적이고 초범이고…. 숨이 막혔다. 경찰서에서 할 일은 없었다. 공동체에 대한 죽은 자의 깨끗한 양심보다 산 자의 검은 마음을 두둔하는 법이 내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현실 앞에서 무기력했다. 형사의 귀띔에 의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형 로펌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한다. 전관예우의 휘황찬란한 후광까지 받으면 아마도 5년 안쪽이 되지 않을까. 법은 산 자를 위한 것이지 죽은 자의 명예나 양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국장이 매우 싫어할 기삿거리다.
말수가 부쩍 줄어든 내게 동생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일거리가 봇물 터졌다고 대답했다. 굳이 살인범을 잡았다고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야 가까스로 잊어갈 즈음인데 상처를 되살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아침은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지 않던가.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거리에서도 마음 숨기기. 정기자 앞에선 더욱더. 몇 달을 더 정신 놓고 살아야 할까.
취재를 위해 서울북부지방법원에 갔다. 몇몇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익숙한 곳이라 대충 살펴보고 흡연 구역에 갔다가 담배 피우는 형사를 만났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오늘 선고공판이 있다는 걸. 형사는 반색했다. 누구요? 뜨악하게 대꾸했다. 있잖아요? 그 살인범. 순식간에 숨이 멎고 현기증이 치솟았다. 코앞에서 별들이 맴돌았다. 잊으려고 온갖 애를 써왔구나. 짐짓 모른 척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려고 지랄발광을 해왔구나. 정기자의 유혹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정신줄 놓고 살았구나. 지난주에 결심공판이 있었고 오늘이 선고공판입니다. 형사는 묻지도 않은 자초지종을 줄줄 풀어놓았다. 곧 시작할 텐데 들어가지요?
형사는 급하게 담배를 짓눌러 끄면서 말했다. 뒤따라가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뒤통수에 단단히 달라붙었다. 변호사가 퇴임한 지 두 달가량 됐는데 판사 연수원 선배랍니다. 그것도 한 기수 앞선. 같은 학교 출신이고요. 불안감은 언제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굳이 형사의 투덜거림이 아니더라도. 판사는 단상 위에 앉아서 방청객을 휘둘러보면서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피고인은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숭고한 생명을 빼앗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바 마땅히 엄한 죗값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말을 멈추고 다시금 방청객을 둘러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겹겹이 쌓여갔다. 심신미약이 인정되고 속죄하고 반성하는 마음이 담긴 반성문과 여러 탄원서를 참고할 때…. 불안감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충분히 교정 교화될 높은 가능성과 앞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할 폭이 넓다는 점 또한 인정됨으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에 처한다.
판결문을 읽는 동안 내내 걸핏하면 방청석을 내려다보는 여유만만함은 온데간데없고 판사는 부리나케 일어나 도망가듯 퇴장했다. 정말이지 순식간이었다. 왈칵 서러움이 복받쳐왔다. 아버지는 파리 목숨이었구나, 있어도 그만 없으면 좋을. 내 것이 아닌 많은 판결문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기사를 써왔던 자신이 더없이 부끄러웠다.
형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 눈치를 살폈다. 고생고생 생고생하며 잡으면 뭐 합니까? 손바닥보다 작은 나무망치로 온갖 선심 쓰는 쪽은 따로 있는데. 형사가 투덜거렸다. 법이 아무리 고무줄이라 해도 울화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침착해야 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일단 발을 들여놓은 이상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가재는 게 편이다. 낮술 한잔할래요? 억울함과 황당함이 여전히 뒤섞인 얼굴로 형사는 길 건너편 도봉시장 골목을 가리켰다. 자매집 등받이 없는 맹꽁이 의자에 옹송그리고 앉아 곱창볶음 안주도 먹지 않고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형사도 나도 아무 말 없이. 현실은 죽은 자들의 위로가 되지 못하고 오직 산 자들의 살판일 뿐이었다. K가 이 땅을 떠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