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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Oct 21. 2023

웹툰 작가가 될래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하월곡동 달동네 칼잠 자던 단칸방 월세살이 무렵이라, 방학하면 벌방 사갑리에 어쩔 수 없이 누나와 함께 내려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한없이 느린 덜컹거리는 무궁화 열차를 타고 풍기역에 내리면 해가 떨어졌다. 스무 가구 남짓 하는 사갑리에서 할아버지의 집은 작은 초가(草家)였다. 머리에 상투 튼 증조할아버지(李用璿, 1889∼1974)를 본 것은 서울 이주 전 풍산읍 안교리에 살 때인지, 그때인지 정확하지 않다.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의 양자(養子)였다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 알았지만, 동생(李用璣, 1893∼1963)의 장남을 양자로 들여왔다는 걸 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긴 곰방대를 물고 어쩌다 가끔 마당으로 나와, 여름 볕을 쐬는 무심한 표정에 대한 기억뿐이다. 양자가 있다 해도 실질적인 대(代) 잇기가 자신에게서 끝났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맏증손자인 나에게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 무엇을 했고 삶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저 좁은 마당을 불편하고 느린 걸음으로 긴 곰방대 물고 유령처럼 걸어 다니는 이미지만 있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해서 그렇지, 증조할아버지는 천방지축 온 동네의 흙먼지 뒤집어쓰며 쏘다니는 증손자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긴 했을 거다. 어쩌면 그런 증손자를 통해 젊은 날들을 되살려 보았을지도. 해야 할 일들과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구별할 나이가 되면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흘리는 콧물을 닦을 줄도 모르는 어린 증손자가 살아갈 세월이 당신의 경험에 비추어 그다지 만만찮지 않다는 짐작으로 애잔한 눈빛을 가졌는지도.


그도 그럴 것이 조선 말기에 태어나 대한제국을 지나 식민지까지 온몸으로 견디다가 해방정국의 좌우충돌, 분단과 한국전쟁, 김수영 시인이 <그놈>이라 지목한 이승만의 반민족적 독재와 뒤이은 4∙19 혁명, 5∙16 쿠데타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는 군인정치의 끝을 보지 못하고 할아버지보다 불과 석 달 먼저 돌아가셨으니, 격변하는 시대의 소용돌이 언저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이미 아물 수 없는 숱한 상처를 앓고 있었으리라. ‘시간화석’에서 언급하였듯이 친일파와 결탁한 군부독재가 겉으로는 증손자에 와서야 끝장났으나, 그 후예들이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살아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할아버지(李甲善, 1917∼1974)에 대한 기억은 충청도 온양에 시제(時祭) 지내러 갈 때 등 유독 나를 아껴 데리고 다녔다고 하나, 풍기 장날의 풍경을 빼놓을 수 없다. 사갑리에서 풍기까지 비포장의 시골길을 버스 타고 갔는지 걸어갔는지 기억에 없으나, 장터 한쪽에서 막걸리 사발 들이켜시는 할아버지를 가만히 올려다본 장면은 최신 영화의 스틸(still)처럼 선명하고 역동적으로 남아 있다. 지금 돌아보니 할아버지의 직업은 프리랜서 한문 기술자였다. 유학자(儒學者)면 몰라도 한문 기술자라니? 생뚱맞지 않은가. 의아해할 수도 있다. 사실 오래전에 할아버지보다 먼저 삶을 산 예이젠시테인(Sergie Mikhailovich Eizenshtein, 1898∼1948)을 영화 기술자로 정의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예술가라기보다 영화 기술자이다. 자기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조국의 사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죽어서야 자신의 생애를 볼 수 있는, 그저 노력이 남보다 조금 뛰어났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예술가라면 자기 시대 밖에서 자기의 생애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문화적 관습에 대한 완전한 자유만이 예술가에게 특권을 부여한다.’ ‘전함(戰艦) 포템킨’을 보고 1991년 3월 14일에 쓴 것이니 젊은 날의 객기를 엿볼 수 있으나 영 틀린 판단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늙은 아버지(李準天, 1938 ∼ )의 증언에 따르면 한문 필체(筆體)가 뛰어나 경북 일대에서 꽤 입소문을 타 주문받은 개인 문집 따위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건넛방에 인쇄기가 있는 풍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문제는 프리랜서라는 점이다. 5남 1녀를 둔 할아버지가 자식 농사에 그다지 많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내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에 닿는데 엉뚱한 판단은 아니었다.


하긴 지금도 프리랜서는 인생을 돈보다, 하고 싶은 일을 통한 성취욕(成就慾)으로 살지 않는가. 그런 할아버지의 일생이 자식에게 영향을 미쳐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구 삼촌(李準東, 1943∼ )은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할아버지처럼 한문 필체를 다듬기 시작했으나, 유학(儒學)의 학문적 깊이와 상관없었다. 호이 삼촌(李準皓, 1946∼1977)의 느닷없는 자살은 여전히 지금도 아픈 기억이지만 할아버지의 자식 농사가 대체로 평균치 이하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삶의 저 끝 – 창원 기행’에서 풀어놓은 막냇삼촌(李準彰, 1952 ∼2009)의 죽음 역시 할아버지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자식이기에.


할아버지의 성취욕은 대구 삼촌에게로 이어졌으나 정도가 심하지 않아 소일거리로 전락했다. 물론 몇십 년 전부터 늙은 아버지도 성취욕을 불태우며 한문 필체 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젊은 날들을 온통 자식 농사에 고스란히 불태웠으니 할아버지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서예대전(大韓民國書藝大展)에 빠짐없이 출품하고 해마다 입출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을 써서 아파트 동 출입구와 당신의 현관문에 붙이신다. 당연히 한 층 위에 사는 아들네의 현관문에도 이른 아침에 인기척 없이 올라와 붙이는 걸 봐서 늙은 아버지의 성취욕은 젊은 날 몸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비로소 뛰어나온 게 아닐까.


작년 가을, 큰아버지(李準仁, 1936∼2019)의 장례식장에 모인 아버지와 대구 삼촌과 옥계 고모(李準姬, 1957∼ )는 마주 앉아 무슨 얘길 나누었을까. 5남 1녀에서 2남 1녀만 남은 시간 속에 오도카니 앉아 살아온 세월의 퍽퍽함과, 힘들 때마다 언덕이 되어주던 기억과, 못내 섭섭하던 일들을 큰아버지와 함께 떠나보냈을까. 큰아버지를 잃은 공허함을 추측할 수 없으나 삶은 계속되기에 남은 이들 사이는 아마도 더욱더 끈끈해져 마음 뜨거워지는 자리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빠,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진학할래요.”


첫째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울먹거리면서 간청했다. 나는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취욕만 채우는 슬픔은 가난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는 사실을 할아버지의 마른 삶을 통해 고단하게 살아온 내 삶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데다가 아직은 존재하지 않지만, 태어날 자식들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노릇. 제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전통으로 빛나는 유구한 인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이전(以前)은 알 수 없으나 할아버지에게서 볼 수 있는 성취욕이 아버지를 거치고 나를 통해 첫째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짐작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반대에 부딪혀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역시 졸업을 앞두고,


“애니메이션 학과에 진학할래요.”


다시 울먹이며 간청했다. 성취욕뿐인 슬픔이 내게서 끝나기를 첫째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마음속으로 기원하였으나 바람은 바람으로 끝나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칭찬할 일이죠. 요즘 애들 그런 거 없어요. 거의 다. 꿈이 없어요. 공무원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수락산 그녀가 말할 때도 나는 성취욕뿐인 슬픔이 삶을 얼마나 헐벗게 하고 비굴하게 만드는지 말하지 않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이 자꾸만 귀에 아른거렸다. 제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 시대에 성취욕뿐인 슬픔만 거듭하는 첫째의 예상할 수 있는 삶이 나보다는 넉넉하기를.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또다시 기원할 도리밖에 없었다.


“점심 먹자. 근데 정확히 네 집이 어디냐?”


해가 중천에 닿자 자려고 누었는데 용덕이가 전화했다. 지난번 미아삼거리 만남 이후 첫 통화였다. 용돈벌이하는 곳이 쌍문역 앞이니 금방 도착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현관문을 열고 4층 아래를 내려다보니 녀석은 이미 와 있었다. 욱진이와 충환이의 얘기를 드문드문 나누면서 점심을 먹고 놀이터 의자에 앉아 봄볕을 쐬었다.


“수영이는 강릉에 있다며? 무슨 일을 하는데?”


나는 녀석의 무남독녀를 꺼냈다.


“국민연금공단에 있어. 작년 6월부터 출근했는데 2년은 지방에 있어야 한대. 그리고서 연고지에 배치하겠지. 네 첫째는 애니메이션 한다고 했던가?”


“웹툰(webtoon) 한다고.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말이야.”


“수영이한테 아빠가 광고 쪽에 있으니까, 그쪽으로 오라고 했는데 한사코 공무원 한다고 우기더라. 공무원을 아무나 하는 줄 아냐고 면박을 줬지. 그런데 정말 아무나 하더라.”


용덕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첫째가 성취욕을 설령 이룬다고 해도 그전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과 눈물을 온몸으로 감당하면서 허기진 슬픔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철인(鐵人)의 의지가 있는지 의아한 건 사실이었다.


오늘도 첫째는 웹툰을 한다.

그리고, 증조할아버지가 그랬듯이, 할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나는 오늘도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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