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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Nov 10. 2023

겨울이 오는 날

“담배도 음식이야.”


외할머니는 애연가였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으나 버스에서 담배를 피던 시절이었다. 의자 등받이 뒤에 재떨이가 달려 있을 정도였다. 그때를 떠올리니 갑자기 먹먹해진다. 20대 초반, 걸핏하면 학교 정문 앞에서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당연히,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불시에 책가방 검사를 했다. 서울 하늘은 맑아도 늘 우중충했고,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은 개나 줘버리는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은 달라졌느냐? 그렇지도 않다. 최소 4천 년의 역사를 가진 권력의 속성은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는 일은 절대로 없다. 살인 무기를 품 안에 감춘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케 마시러 고급 횟집에 갈지언정.


어쨌든 외할머니는 골초였다. 이른 오후에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점심값으로 소주 한 병을 샀다. 나른한 오후 햇살이 거실에 잔잔하게 깔려 있어 엉덩이는 따뜻했다. 초가을 바람에 잎사귀들이 첫눈처럼 허공중에서 둠칫둠칫 나풀거리는 풍경을 거실 통유리 밖으로 보면서 외할머니와 나는 함흥 얘기로 소주잔을 비웠다. 맏이인 엄마가 태어나기도 전인 신혼 시절은 외할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함흥역에서 근무하던 외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저녁은 골목을 기웃거리는 수상한 떠돌이 개도 이쁘다고 했다. 지나가는 개가 보기 좋다니! 게다가 열도에서 건너온 떠돌이잖은가?


아쉽게도 이 장면만 기억에 있다. 언제, 어떻게 함흥에서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어도 일본의 패망에 뒤이은 굵직한 사건들이 연거푸 터져 현대사를 할퀴고 지나갔다. 거칠고 위험한 세월 속에서도 서로를 사랑하며 하루를 아끼며 알뜰하게 살아왔을 기억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외할머니도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해 가을, 외할머니는 맏딸 집에서 두어 달 보내고 안동으로 내려갔다. 보름쯤 지났을까? 외할머니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훌쩍 건너갔다. 무딘 칼바람이 옷깃을 헤집는 초겨울 어느 날이었다. 그날, 첫눈이 왔었던가? 아니면 겨울비가 내렸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흐릿하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숱한 하루들이 서둘러 우리들을 지나갔다.


“아무래도 무릎 수술을 해야 하지 않겠냐?”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어도 엄마는 항상 다리 통증을 호소했다. 이미 외할머니의 마지막 나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거의 이십여 년 전에 수술한 인공관절은 쓸모를 다했을 것이다. 엷은 치매가 어느 사이 두터워질지 걱정스러웠지만 수술을 늦출 수 없었다. 통증은 허리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는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허리 수술은 더욱 위험했다. 고혈압에, 해소 천식에, 손 떨림에, 치매까지 아침저녁으로 한 움큼씩 먹는 약이 엄마의 하루를 지탱하고 있었다. 당연히 간호는 내 몫이었다. 폐렴으로 안동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간병인 노릇을 한 터였다. 그때만 해도 정신은 말짱해서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우리들은 보통 스물 중반쯤엔 동창회에 나가고, 서른 가까이부터 친구들 결혼식에 불려 가고, 서른 넘어선 돌잔치, 헐레벌떡 마흔 줄에 들어서면 자식들 결혼식에 슬슬 참석하다가, 쉰 넘어 뱃살이 두둑해지면서 점점 병원과 가까워진다. 이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랬다. 몸과 함께 가는 삶이다.


입원하는 날, 동생과 함께 병원에 갔다. 수속을 마치고 병실에 올라가자, 간호간병통합서비스의 병동이었다. 간호사는 대뜸 앞을 막아섰다.


“보호자는 안 됩니다.”


단호했다.


“치매가 조금 있으셔서….”


휠체어를 밀던 동생이 간절하게 말했다.


“그럼, 한 분만 됩니다.”


“조금 있으면 누나가 올 텐데, 그때 교대해도 되나요?”


“806호에요.”


간호사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병실 방향을 가리켰다. 동생은 휠체어를 끌며 병실로 걸어갔다. 나는 입구에서 쫓겨났다. 춘천 누님이 올 때까지 1층 로비에서 기다렸다. 한참 후에 나타난 누님에게 엄마의 복약 방법을 설명했다.


“금요일에 와. 교대해야 하니까.”


누님이 말했다. 결혼 전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터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병실로 올라가고, 얼마 후에 동생이 내려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입원 다음 날 수술한다는데, 엄마의 늙은 몸도 걱정이지만, 마취로 인해 치매가 두터워질 수도 있었다.


기억이 사라지면 마음을 잃는다. 마음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져 살아온 관계가 지워진다. 갓난아이처럼 단순해진다. 가족을 제외하면 세상은 온통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인연이 사라지는 것만큼 쓸쓸한 것이 또 있을까?


금요일 오후, 누님과 교대했다. 3인실 병실이었다.


“잠을 못 자. 왜 그런진 겪어보면 알 테고, 지난밤에는 죽겠다고 침대에서 자꾸만 내려오려고 했어. 옆 사람들도 잠을 설쳤을 거야.”


“춘천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


“월요일에 올 테니까, 수고해.”


3박 4일을 병실에서 보냈다. 환자든 간병인이든 해야 할 일상의 일들을 할 수 없는 병실 생활은 심심하다. 당연히 8층 창밖으로 보는 가을 풍경은 고즈넉했다. 시간이 멈춰 있는 듯 흐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도 외할머니처럼 겨울이 오면 훌쩍 떠날까, 숨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병실 밖의 일상은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다. 보수 신문의 사설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세상은 빠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당연히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에게 낭만 가득히, 자전거를 타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에 놀러 가는 석양 대통령>은 없었다.


카인은 병문안 오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서 외할머니가 살아있는 것처럼 카인의 마음속에 외할머니는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외할머니는 골초였다>는 아닐 것이다. 기억은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그 속에는 절망도 있고 슬픔도 있으며 안타까움도 있다. 어쩌면 끝끝내 이룰 수 없는 소망이 있을지도. 지금을 살아가는 나도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엄마는 예외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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