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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Mar 09. 2024

그해 가을은 겨울이었네

아주까리 잎사귀들이 늦가을 오후의 농염한 햇살을 받으며 잔바람에 팔랑거렸다. 여름에는 파란 성게처럼 돌기를 곧추세우고 옹기종기 모여 튼튼하게 달려 있었는데, 누렇게 익어 생기 잃은 껍질이 드문드문 떨어져 나간 피마자가 손톱만큼씩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이천을 건너온 바람은 미지근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열댓 가구가 모여 있는 뚝방 동네에 친구는 없었다. 그 집들과 조금 떨어진 펑퍼짐한 땅바닥을 다져 구들을 놓고, 싸구려 시멘트 블록으로 벽을 세우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은 단칸방 집은 무허가였다. 전기도 없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바라보는 세상은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는 삼국지보다 유혈이 낭자했다. 세상은 가질 수 없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우울했고, 기필코 이루어 내야 할 그 무엇도 없었다.


예기치 못한 사소한 사건이 삶 전체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던 소년이었다. 동기 부여가 없는 학교생활은 지루했으며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졌고, 가난한 밥상머리 앞에서 허기를 채우지 못하는 저녁은 흔했다. 그나마 즐거움이라면 삼중당 문고판 삼국지를 호롱 불빛에 기대어 읽는 시간이었다. 곤궁한 현실에서 도망쳐 온갖 영웅호걸이 숨 쉬는 삼국지 안으로 들어가 웅장한 세상을 만났다. 위로가 될 수 없지만, 현실이 주는 궁핍을 잊는 도피처로 충분했다. 방문 틈으로 살금살금 들어와 창문 없는 단칸방을 휘젓는 인기척에도 흔들리는 호롱불은 서글펐다. 간혹 엉망으로 취한 술꾼이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면서 부실한 벽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기도 했다. 얼마 전에 없었던 집이 생겨 길을 온통 차지한 터였다. 오패산을 넘어 학교 가는 길에 즐비한 집들은 견고했다. 햇살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에 형광등도 있었다.


늦여름 하굣길이었다. 오패산을 내려와 주택지를 통과하면 초봄의 인분 냄새가 여전히 풀풀 나는 밭이었다. 밭을 지나면 우이천이었다. 햇살이 사선으로 기울어 모든 게 느려질 무렵이었다. 사내 둘이 우이천 개천 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동아줄을 아주까리 밑동에 단단히 묶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어서 개천 길을 따라 걸었다. 사내 둘이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서 동아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황구였다. 교수형 매듭으로 만든 줄이 모가지에 걸려 있었다. 개천의 콘크리트 옹벽 중간쯤의 높이에서 점점 조여오는 숨통을 어쩌지 못해, 개는 절망적인 몸짓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사내 둘은 적장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리는 삼국지의 칼잡이보다 잔인했다.


“고통스럽게 죽어야 살이 부드러워져.”

“맞는 말이야?”

“믿어보라니까!”


사내 둘은 시시덕거렸다. 아주 짧은 순간 동공이 뒤집힌 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서늘한 눈빛이란! 사내 둘은 쭈그려 앉아 개가 발버둥 치는 걸 빤히 내려다보았다. 장난삼아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뭐가 즐거운지 저희끼리 시시덕거렸다. 황구의 격렬한 발버둥은 차츰차츰 줄어들었다. 아주까리 잎사귀가 파르르 떨리다가 이윽고 멈췄다. 사내 둘은 동아줄을 당겨 황구를 끌어 올렸다. 사지가 축 처진 황구의 눈은 이미 뒤집어져 있었다. 사내 둘은 군침을 흘렸다. 황구를 둘러메고 초봄의 인분 냄새가 여전한 밭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콘크리트 옹벽에 격렬하게 부딪히며 조여오는 모가지 매듭에 발버둥 치는 황구는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삼국지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첫서리가 내렸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 소복하게 내려앉은 서리는 아침 첫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이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주까리 잎사귀가 마지막 남은 열정을 태워 가까스로 버티는 사이, 피마자가 땅바닥에 몇 알씩 떨어져 저희끼리 속삭였다. 하루는 지독하게 길어, 얼기설기 나무 조각으로 덧댄 문 앞에 퍼질러 앉아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열댓 가구뿐인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동네는 무허가가 아니어서 전기가 들어왔다. 지붕 낮은 집들에 방마다 손바닥 창문이 있고, 좁은 마당에는 수돗가도 있었다. 동네 넘어 들판에서 눅눅하고 퀴퀴한 아교 냄새가 몰려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건물은 아교공장이었다.


“야! 잇 쌍년아! 얻다 대고 지랄이야! 여편네가!”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술에 넋 나간 술꾼이었다. 무허가 집을 지을 때부터 봐왔던 치졸한 폭행이 눈앞에 펼쳐졌다. 술꾼은 무지막지한 손으로 여자의 뺨을 후려쳤다. 발길질도 서슴지 않았다. 다음 장면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술꾼은 제풀에 지쳐 두 팔을 늘어뜨린 채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동굴보다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방문 안으로 4홉들이 소주병이 보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벌어지는 행패라 동네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아교를 만들기 위해 땅바닥에 펼쳐놓은 온갖 가죽들 사이를 생각 없이 걷다가, 동네를 바라보면 울컥, 슬픔이 쏟아졌다. 가지는 물론이고 밑동마저 썩어, 도저히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뿌리에서 새순이 돋는 기적이 동네 사람들에게도 일어날까? 하늘은 더없이 무거워 낮은 지붕으로 하루를 가까스로 버티는데, 내일 아침은 또 얼마나 두려울까? 슬픔은 끈적끈적한 아교 냄새만큼이나 독했다. 전짓불이 들어오는 동네가 부러운 무허가 집은 독한 슬픔보다 쓸쓸했다. 산책을 끝내고 쓸쓸함으로 가득 찬 무허가 집에 돌아오면 마음 안에서 황량한 마른 먼지바람만 일었다. 세상 어디에도 기댈 언덕 하나 없었다.


첫서리가 내린 이후 하늘은 조금씩 더 무거워졌다. 하루가 다르게 아주까리 잎사귀는 누렇게 빛바래 잔바람에도 바스락거렸다. 학교생활은 무의미했다. 전교 회장으로 지명된 같은 반 친구와 형편을 비교하는 짓거리도 무의미했으며 점심시간이면 운동장 수돗가를 달려가 수도꼭지를 입안 가득 밀어 넣는 굶주림도 무의미했다. 머지않아 세상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절벽 밑으로 곤두박질쳐 부러워할 그 무엇도 없는 죽은 황구가 되지 않을까? 안개처럼 흐릿하게 짐작했다. 그리고 그날이 결국 오고 말았다.


사내들은 중무장했다. 구청에서 나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진 철거 기간이 지났으므로 강제 철거에 들어간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선전 포고였다. 느슨한 오후 햇살 사이로 서늘한 발톱을 숨긴 찬 바람이 우이천 너머에서 떼거리로 몰려왔다. 사내들이 해머를 휘두를 때마다 부실한 시멘트 블록이 삼국지의 어설픈 장수처럼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 헐벗은 세간살이가 속살을 드러냈다. 슬레이트 지붕이 방바닥으로 내려앉으면서 조각조각 흩어졌다. 해머로 방바닥을 내리치자, 거칠게 저항하던 구들장은 마지막 악다구니를 쓰면서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다. 눈 깜짝 사이 집은 쑥대밭이 되었다. 전쟁터였다. 대장기는 갈기갈기 찢어져 내팽개쳐지고, 곳곳이 말발굽으로 파헤쳐졌고, 검붉은 피가 흥건하게 고인 웅덩이도 있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사내들이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돌아가자, 비로소 밤이 무서웠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가을의 밤바람이 허공중에 떠돌던 습기를 붙잡아 서리로 쏟아낼 터였다.


“나보다 더한 놈들이네! 이러니 술을 끊을 수 있나!”


먼발치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바라보던 술꾼이 말했다. 개천 콘크리트 옹벽에서 발버둥 치던 황구의 간절한 눈빛으로 술꾼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으나 술꾼은 이내 외면하고, 뒤돌아 4홉들이 소주병이 있는 어두운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술꾼을 탓할 수 없었다.


밤이 오기 전에 서리를 막아줄 지붕이 필요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져도 방 가운데 기둥을 세워 부서진 슬레이트를 얼기설기 겹쳐 지붕을 올렸고, 부서진 시멘트 블록 벽은 아쉬운 대로 천막으로 대신했다. 아주까리는 잎사귀를 모두 떨군 채 줄기만 남아 바람에 맞서고 있었다. 가녀린 가지가 파르르 떨렸다.


오는 밤을 막을 수 없었다. 두터운 솜이불 밑에 기어들어가 반듯이 눕자 마저 포개지지 않은 슬레이트 사이로 별빛이 쏟아졌다. 천막이 수시로 펄럭였다. 어떤 날은 별빛 대신 빗물이 쏟아졌다. 세숫대야와 플라스틱 파란 바가지 안으로 초침처럼 떨어지는 빗방울은 마음이 흘리는 눈물이었다.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묵직한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듯 통증이 밀려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헛구역질이 났으며, 조각난 슬레이트 지붕이 제멋대로 날아다녔다. 팔다리로 엉금엉금 기어 가까스로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공기가 귀밑을 스쳤다. 깊이 심호흡했다. 생각을 짓누르는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고, 비로소 눈앞이 조금씩 나타났다. 아주까리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들은 바짝 말랐고, 줄기마저 서서히 생기를 잃어 가는 막대기처럼 땅바닥에 꽂혀 있었다. 그 옆에 반쯤 부서진 연탄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아침은 장렬하게 전사한 구들장을 심폐 소생한 뒤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눈물들과 생각을 마취하는 가스들이 모여 유신헌법은 단단해졌고, 거침없었다.

우이천 콘크리트 옹벽에 온몸을 부딪치며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는 교수형 매듭을 어쩌지 못하는 황구는 정말 개였을까? 어쩌지 못해 그저 바라보는 소년이었을까?


그해 가을은 이미 겨울이었다. 봄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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