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 사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가연 Nov 13. 2024

8. 사랑은 여기에 있었다는 걸

1시간 뒤에 바로 만나다니 서둘러야겠다. 전화를 끊자마자 옷장 문을 열었다. 뭘 입어야 신찬성 눈에 안 거슬리려나. 지도 그냥 저승사자 마냥 검은색 옷 입었으면서 나한테 뭐라고 하기는. 머릿속으로는 궁시렁대면서 옷장을 뒤적이는 건 멈추지 않았다. 이거 입으면 또 나풀거리는 치마 별로라고 하려나.      


문득 신찬성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평소에 공연이나 발표날이 아닌 이상 옷장에서 아무거나 꺼내 입고 나가곤 했다. 나름 처음 만나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기에 기껏 치마를 꺼내 입고 갔더니, 후에 말하길 첫 만남에 옷이 너무 이상해서 충격받아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다 엄마가 사준 옷인데. 이쁘기만 하고만.   

   

이왕이면 걔가 좋아할 만한 옷을 입는 게 좋으니까. 괜히 또 만나서 딱 옷 보고 인상 찌푸리면 나도 기분 안 좋지 않나. 최대한 무난한 청바지에 핑크색 샤랄라 한 후드를 입고 집을 나섰다.      


신찬성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건 아직도 어색하기만 했다. 그렇게 매일 통화하면서도, 한 번 전화하면 두 시간 안에 끊는 일이 없으면서도, 막상 마주하니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신찬성 시선도 계속 내가 아닌 딴 곳을 보고 있었다. 시계를 만지작거리다가, 괜히 메뉴판을 들추다가, 그렇지 않을 땐 정면이 아닌 사선만 향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자 말을 걸었다.      


“여자친구한테는 뭐라고 하고 나왔어?”

“모임 간다고 했다.”

“뭐?”

“전부터 간다고 했다. 보니까 어차피 오늘 오는 사람들 별로고. 재미없겠더라.” 

“아니.. 그래도 돼?”

“그만큼 믿으니까. 신뢰가 있으니까 뭐.”      


내가 뜨끈 미지근한 표정을 짓자 신찬성이 이어서 말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어? 다 못하는 거야. 그런 거 다 알면 또 내가 기분 풀어줘야 되고.” 

“그렇구나...”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 사이의 일이었고 신찬성의 말이 어련히 맞겠지 싶었다. 그렇게 신뢰 관계일수록 서로에게 솔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스쳤지만, 내가 의견을 내면 신찬성은 인상만 찌푸릴 것 같았다. 괜히 반기를 드는 말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커플링이야?”

“이거.. 어 맞다. 니 이거 금이 장점이 뭔 줄 아냐? 나중에 팔아도 돈 받을 수 있다.”     


여자친구가 들으면 서운하겠다. 행여 아주 나중 일일지라도 커플링 팔 생각이나 담아두고 있고.   

   

“그 팔찌는 뭐야?”
 “이거 내가 산 거 아니다. 걔가 준 거다.”      


신찬성은 팔찌를 잠깐 만지작하더니 이내 또 시선을 돌렸다.    

  

“근데 니 원래 말할 때 눈 잘 못 쳐다보냐. 왜 나를 안 쳐다보고 말해.” 

“야 씨. 니가 이쁜 여자였으면 내가 쳐다보지. 니 그렇게 입술 부르터가지고 얼굴도 그렇게 생겼는데 내가 보고 싶겠냐.”      


하.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하지만 입이 살짝 벌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원래 사람과 사람이 의사소통할 때 눈을 마주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닌가. 나도 원래 눈을 잘 쳐다보지 못해서 일부러 더 노력하고 연습하곤 했었다. 이젠 나의 시선이 신찬성이 아닌 괜히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쳐다보게 되었다. 


          

“택시 잡아줄게.” 


나는 쇼핑몰에서 집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신찬성은 아니었다. 버스 타고 20분은 가야 했다. 나 때문에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또 온 것이었는데 하필 비까지 쏟아지니 더 미안해졌다.  

    

“춥잖아. 안으로 들어와.”


신찬성에게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내가 바깥쪽으로 가서 섰다. 지금 내가 신찬성이 비라도 맞을까 걱정한 건가. 요동치는 마음이 낯설었다.           


이틀 연속으로 주말 동안 신찬성을 만나고 나니 깨달았다. 신찬성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내내 노력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김현우 얘기를 하면 싫어하는 내색이니 하지도 않았다. 별로라고 했던 옷은 입지도 않게 되었다. 반면 신찬성이 쇼핑을 좋아하니, 평소에 관심도 없던 쇼핑이 덕분에 너무 즐겁다며 연신 덕분이라고, 고맙다고 말했다. 과연 나는 진심으로 쇼핑이 즐거웠을까 아니면 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즐겁다고 어필하고 싶었던 건가. 나는 정말 신찬성과 함께라면 어딜 가든, 뭘 하든 상관없던 게 아닐까. 신찬성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내가 즉각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지. 매일 저녁 8시, 9시 무렵이 되면 신찬성과 전화하는 게 루틴처럼 자리 잡았다. 오늘 하루쯤은 전화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습관 들면 안 된다 싶다가도 ‘에이 뭐 어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고작 전화로 수다인데’ 하면서 전화를 했다. 여자친구도 있는데 하루, 이틀 전화하지 않겠다고 휴대폰을 저 멀리 치워두기도 했다.     

 

그런데 전화 안 한 지 이틀 만에 신찬성에게 먼저 전화가 오자 미소를 머금지 않았던가. 나는 신찬성의 전화를 기다렸다. 단순히 전화로 수다할 친구가 있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은 건 줄만 알았다. 내가 신찬성처럼 편하게 전화할 수 있는 다른 친구들이 있었더라면, 더 빨리 내 마음을 눈치챘을 텐데.      


김현우와 신찬성이 물에 빠지면 신찬성을 구할 것 같다. 당장 내가 죽는데 둘 중 한 사람만 만날 수 있다면 신찬성이 보고 싶다. 김현우가 아프다고 하면 위로의 카톡을 보내고 말겠지만 신찬성이 아프다고 하면 밤새 간호라도 해주고 싶다. 아아아악. 망한 거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차라리 받아주지를 말지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김현우에 대한 마음을 가득 담아 곡을 썼던 나인데. 착잡한 마음으로 1절을 완성했다. 제목은 ‘사랑은 여기에 있었다는 걸’이다. 틱틱대면서도 그 안에는 분명 나를 향한 마음이 담겨있었는데. 그렇게 나를 받아주고 나를 울리고 나를 웃게 하지 말지.      


이젠 나를 믿고 돌아서려 해 

다시 제자리로 갈 수 있을 테니까      


가사를 쓰고 부르며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느꼈다. 김현우를 좋아할 때는 동아리 단톡방도 나가고, 김연지가 김현우를 생각나게 한다면 김연지 역시도 끊어내고자 했다. 그런데 신찬성은, 신찬성이 없는 하루는... 있을 수 없다. 신찬성은 이미 내 피부와도 같았고 심장의 한 조각이었다.      


가족 같고 형제 같고 남매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그런데 그것이 다시 말하면,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다. 같은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어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며 둘 다 낄낄거렸고 그 순간엔 내 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과연 사실이었을까. 정말 신찬성이 네 벗은 몸을 생각만 해도 토할 거 같다고 말해도 아무렇지 않았나. 가시가 되어 박히지는 않았나. 그땐 몰랐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 가슴에 상처를 내던 말들이 떠올랐다.      



며칠 전부터 신찬성이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평소에 그래도 카톡으로 티키타카가 오갔는데, 요즘은 하루에 한 번꼴로 답장이 왔다. 


요즘도 바쁘냐 ㅎㅎ     

다음 주까지 리포트 12장 써야 됨 ㅜㅜ      


난 음대생이라서 얘 전공은 얼마나 바쁜지 가늠이 안 된다. 카톡 답장도 거의 안 하니, 매일 하던 전화도 걸지 않게 되었다. 하루, 이틀, 사흘, 적어도 3일은 참고 전화하기로 다짐했다.      


“니랑 이렇게 지내는 게 좋은 점만 있는 게 아니야. 장단점이 있어.” 

“...” 

“니 그런 김현우 얘기하는 것도 다 들어줘야 되고. 니 전화 올 때마다 내가 하던 일도 못하고 들어주고. 지금도 나는 이거 빨리 끝내야 되거든?”

“아니.. 요즘엔 김현우 얘기 안 하잖아.”      


김현우 얘기 안 한 지가 언젠데. 이제 정말 아닌데. 내가 ‘사랑은 여기에 있었다는 걸’ 노래를 쓴 줄도 모르겠지. 요즘 내가 힘든 얘기 한 거 없었는데. 그냥 얘기하고 싶어서 전화한 건데.      



“미안해...”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 분명 나는 요즘 연락이 갑자기 드문드문해져서 이상하고 시무룩했어도 평소와 똑같이 밝게 전화를 걸었거늘. 갑자기 어느 순간 사과를 하고 있었다. 내가 신찬성을 힘들게 했나. 김현우 얘기하면서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웃고 떠든 적이 더 많은데. 분명 신찬성도 같이 웃고 즐거워했는데.   

   

“미안해. 화내지 마.”

“니 때문에 난 운동도 못 갔다고. 야 나도 지금 술 마셨거든? 뭐 니만 힘드냐? 나 니 감정 쓰레기통 아니야.”

 

신찬성이 계속 쏘아붙이다 이내 한숨을 쉰다.     


“미안해. 화내지 마.” 


나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될 뿐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신찬성과 메시지도 나누지 않고 전화도 하지 않았다. 이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전공 애들도 과제 마감 기간이 끝났을 텐데. 지금쯤이면 제일 바쁜 시기는 지났을 텐데 아직도 바쁜 건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일주일째 이렇게 기다리는 게 맞는 건지 불안해졌다. 신찬성한테 카톡 보내는데 이렇게 용기가 필요하다니.           


무슨 일 있어? ㅠㅠ 걱정 돼.      


너랑 이렇게 지내는 거 나랑 정말 안 맞는 거 같다. 남은 학교 생활 열심히 하고 졸업 잘하길 바란다. 이제 연락 안 했으면 좋겠다.      


사랑해      


꺼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