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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서인간 Aug 04. 2022

혈액형과 성격

우생학의 함정

Way to Lanai Airport. Lanai Hawai (2020) 종이에 과슈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는 19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루카와 다케지라는 일본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 교수가 자신의 친척과 지인 ‘3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혈액형 기질 상관성에 관한 연구’를 '일본 심리학회지'에 발표했다. ‘혈액형이 다르면 성격도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예를 들어, A형은 수줍음을 많이 타고 내성적이며 B형은 활달하고 친절하다는 것이다.  


다케지 교수는 왜 혈액형이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혈액형이 성격과 연관이 있다는 주장의 기원을 따져 올라가 보면, 유전적으로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우생학적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19년 힐슈펠트라는 의사가 전 세계 16개국의 군인이나 난민 8,500여 명의 혈액형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북유럽·서유럽 출신의 백인은 A형이 많고, 동유럽·유대인·아시아 출신의 유색인종은 B형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우생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A형인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인종이 가장 진화한 인종이라고 주장하며 인종계수라는 수치까지 만들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1.18로 '아시아-아프리카형'이며 일본은 1.48로 '중간형', 4.09인 영국인은 '유럽형'에 속한다.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이를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우월하다는 근거로 제시하였다.


심리학과 의학이 발전하면서 우생학은 아무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혈액형과 성격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연구들 역시 조사 과정(표본 추출과 통계 분석 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종의 우월성을 근거로 차별과 학살을 자행하던 세력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혈액형 성격론도 대중의 관심에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 일본의 방송작가인 노미 마사히코가 쓴 <혈액형으로 알 수 있는 상성>이란 책이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노미 마사히코의 아들, 노미 도시타카는 혈액형 인간학 연구소까지 설립했다. 방송, 출판, 광고, 만화 등에서 캐릭터의 성격과 혈액형을 연관시키는 내용이 속속 등장했고 혈액형 성격론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혈액형이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믿음은 단순하지만 재미있고 대중의 흥미를 유발해 여러 가지 상업적 용도로 활용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일본에서 일어난 유행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지금도 서점에는 <혈액형에 따른 연애 방법> <혈액형별 공부법> <혈액형별 건강 관리법> 같은 책들이 넘쳐나고 있다.


성격에 대해 확인된 팩트는 성격이 여러 환경적(문화적) 요인과 신체적(유전) 요인에 따라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성격은 매우 다면적이며 무수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단순화(혈액형, 별자리 등)하거나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는 과학적, 합리적 근거가 없다. 이를 근거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해서는 안된다. 편견과 억압,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혈액형 성격론과 관련해 유의할 점이 있다. 혈액형 성격론을 굳게 믿고 있는 누군가에게 '혈액형 성격론이 유사과학이며 미신에 다름없다'는 사실을 설득시키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당신이 A형일 경우, 혈액형 성격론이 사실이라고 우기는 상대방에게

1. 화를 내면 -> "발끈하는 거 보니 소심한 A형 맞네."

2. 차분하게 반박하면 -> "재미로 하는 얘기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거 보니 소심한 A형 맞네."

3. 무시하면 -> "삐진 거 보니 소심한 A형 맞네."

4. 맞장구를 쳐주면 -> "속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수긍해주는 거 보니 소심한 A형 맞네."

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확증 편향은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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