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올해는 좀 더 정돈된 날들이 되길 바라며.
< 2022년 설날 연휴기간 동안 반드시 해야 할 일>
책장 정리하자 제발! 발 디딜 곳이 없다.
주말까지 5일간의 설날 연휴였다. 코로나의 확산세로 친척집 방문을 자제한 지 2년째였고 며느리가 아닌 덕분에 음식은 가족들끼리 먹을 만큼 적당히 했으므로 혼자만의 시간이 차고 넘쳤다. 어영부영 먹고 자고 멍 때리며 보낸 연휴가 대부분이라 올해는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엄청난 결심과 큰 뜻이 있었다기보다 매년 똑같이 나태하게 보낸 내 모습이 부끄러웠고 왠지 모를 허무함과 무력감이 들었다. 큰 결심은 압박감으로 다가와 해내지 못하면 좌절감이 오므로 실천하기 적당한,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책을 고르고, 버리고, 남기다.
서재가 있을 만큼 우리 집은 크지 않았고 그보다 더 작은 내 방에는 침대 하나, 서랍 하나, 신시사이저 그리고 책장 2개가 있다. 이 정도 만으로도 꽉 찰 정도로 작은 방이다. 어렸을 때는 책보단 나가서 놀기 바빴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재밌어서 사고, 표지가 예뻐서 사고, 갖고 싶어 사고, 선물 받은 책들까지.. 이미 다 꽂고 그 위까지 눕혀서 쑤셔 넣었는데도 자꾸 삐져나왔다. 마땅히 둘 곳이 없어 책장 앞에 쌓고, 침대 머리맡에 쌓고, 문 앞까지 쌓아둔 탓에 방문을 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책이 남들보다 많아서가 아니라 내 방 크기에 비해 많았던 거다. 안 읽은 책이 수두룩한데도 사은품에 혹 해 책을 사고 마는 호구인 탓에 이렇게 차고 넘쳤다.
어느새 엄마는 외면했고 나조차 들어갈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앞으로 더 바빠질 텐데 오늘 아니면 시간이 없어! 지금 하지 않으면 넌 침대 위에서만 생활하게 된다고!'
스스로에게 긴급함을 상기시키며 데드라인을 정했다. 시간이 많으면 나중으로 미룰 걸 알기에 저녁에 언니와 조카들이 잠깐 들린다는 얘기에 그 시간 전까지 끝내자는 굳은 결심으로 드디어 책장에 손을 댔다. 두둥!
먼저, 책을 골랐다.
완독 후 지난 3년간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책, 여행 준비를 도왔던 가이드 북, 출처를 알 수 없는 교재 및 간행물, 색이 노랗게 바랜 책들을 꺼냈다. 책장 앞 자질구레한 소품들을 바닥에 내려 두고 한 권씩 꺼내 비닐봉지에 담았다. 묶을 끈이 마땅치 않아 큰 봉투에 대수롭지 않게 넣다 보니 어느새 봉투는 혼자 들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찼다. 여분의 봉투가 없어 그냥 옆에 버릴 책을 쌓았다. '이건 월급 받고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산 책이었네', '반디 앤 루니스 서점에서 친구 기다리다가 산거였는데', '이 책 읽었었나?' 마치 그 책과 추억을 나누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책을 골라냈다. 그렇게 쌓다 보니 어느새 커다란 2개의 봉투와 책 탑이 쌓였다. 권수를 세어보니 60권 정도였다. 이 좁은 방에 참 많은 책들이 숨겨져 있었구나!
이제, 책을 버려야 한다.
문 앞에 탑이 쌓여있어 청소를 하기 위해선 일단 버리고 와야 했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고질병이 있어 품고 있었던 책들이었고 매정하게 떠나보내긴 아쉬워 다시 들여다봤다. 색이 바랜 책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내 삶이 좀 더 폭넓고 깊어지길 바라며 읽고 즐겼던, 성장에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준 책들이었다. 이놈의 코로나가 성행하기 전, 여행지를 정하면 무조건 가이드북 책 한 권을 사서 정독했던 습관이 있어 여행했던 모든 나라의 가이드북이 있었고 책장마다 밑줄 긋고 인덱스를 붙여가며 정보와 함께 기분 좋은 설렘을 전해주었던 책들이었다. 배워보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던 책들과 공감과 위로를 보냈던 책들이 다 한데 모여 있었다.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비워내야 채울 수 있기에, 책마다의 추억을 나눔으로 마무리지으며 책장을 닫았다.
무게를 고려하여 들 수 있는 만큼만 봉투에 넣었더니 어림짐작으로 3번은 왔다갔다 해야 했다. 양손에 한 봉투씩 들고 분리수거함을 찾았다. [종이] 칸 옆에 [종이/책] 칸이 따로 있어 그곳에 넣었다. 3번을 낑낑대며 왔다갔다 하니 관리원분이 창문을 열고 내다보시며 "수거하는 할아버지 좋아하시겠네" 하셨다. 밑줄 긋고 낙서하는 걸 좋아해 깨끗한 책이 없었고 중고시장에 내놓거나 무게로 돈을 받아 팔 정도의 부지런함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시작한 책 정리였으니 관리원분 말처럼 수거하는 할아버지가 좋아하신다면 그걸로도 대만족이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책들은 새로운 자리를 마련했다.
이미 다 읽은 책이지만 다시 보고 싶거나 소장하고 싶은 책들은 남겨두었다. 이미 앨범과 각 종 기념품, 액자, CD로 채워진 칸을 제외하고 책을 놓을 수 있는 칸은 단, 4칸이었다. 한 칸은 시집과 얇은 책, 한 칸은 소설/에세이, 한 칸은 여행, 한 칸은 종교/취미/예술로 채웠다. 한 줄로는 조금 모자라 그 위에 눕히고 다시 앞칸에 세워두었다. 이렇게 다 읽은 책은 책장에, 앞으로 읽을 책들은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그래도 연휴 때 몇 권 읽었더니 책 길이가 짧아졌다. 아주 조금.. 이게 어디인가! 책 옆에 푸 인형을 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장장 4시간에 걸친 책장정리는 완벽하진 않으나 오늘의 최선을 다해 끝냈다. 허리는 끊어질 것 같았지만 마음의 짐 하나 덜어낸 나는 어깨가 펴지고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하고 뿌듯했다. 오예!
여전히 서점가는 것을 좋아하고, 온라인 장바구니에는 사고 싶은 책이 가득 차있다. 책장 넘기는 소리는 편안하고 손가락으로 종이를 비벼야만 느낄 수 있는 질감은 따뜻하다. 밑줄 쭉쭉 그으며 읽은 티를 내기도 하고 모르는 단어는 사전 찾아 옆에 메모하는 것이 나에겐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중 하나이다. 그렇게 돈을 지불하며 책을 사고 가방에 꼭 챙겨 다니며 가까이 두었는데 다 읽고 나니, 필요가 없어지니, 매몰차게 버리는 것 같아 정리하는 동안, 그리고 글을 쓰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버려진다'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에 서글픔이 가득해서인지 이별에 약한 난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마냥 붙잡고 있는 것이 최선이 아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소중한 것을 더욱 간직하기 위하여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햇볕 잘 드는 서재나 기다랗고 높은 나무 책장이 너무 갖고 싶지만, SNS에서 자주 보이는 분위기 있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책을 보관하고 싶지만, 가족들과 함께 사는 나로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알기에 무작정 사는 것은 자제하기로 했다. 다행히 직장 옆에 도서관이 있어 대여해서 읽고 마음에 계속 남는다면, 소장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그때 사기로 했다. 좁은 방에 처박힌 책을 소중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가방에 들어갈 만한 가벼운 전자책 단말기도 알아보고 있다. 먼저 써 본 친구는 처음엔 낯설었는데 소위 벽돌 책으로 불리는 두꺼운 책을 안 갖고 다녀도 된다며 내 돈 내산 후기를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다만, 서점 가서 책 구경하며 노는 즐거움 또한 놓칠 수 없기에 그러다 사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약간의 여지는 남겨놓았다.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 출판시장에 작게나마 일조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래오래, 즐겁게 읽기 위하여, 좀 더 건강하고 지혜로운 방법을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