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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야옹 Feb 27. 2020

술 못 마시는 사람의 와인 투어

파리 말고, 프랑스 (1) 제 주량은 두 잔입니다

출발하기 전에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논픽션 에세이에도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주로 잡지사의 의뢰를 받아 여행 상품과 축제 등을 취재하고는, 대체로 남의 돈을 받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삐딱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불만 가득 섞인 글을 제출했다. 일주일간의 캐리비안 크루즈 선박 여행 상품 체험기에서 선택권의 박탈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언급하지를 않나, 미식 잡지사의 의뢰로 랍스터 축제에 다녀와서는 다른 생물을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지를 않나, 하여간 내가 마케팅 담당자였다면 팀장에게 들고 가서 이래도 외주 비용을 지불해야 하냐고 따졌을 만한 문제작을 속속 내놓았다.


그러나 그의 논픽션 에세이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는데, 비록 내가 비평가는 아니지만 그 삐딱하고 못된 시선이 독자들에게 있어 솔직함의 증거로 작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정직한 이야기를 갈망한다. 나는 인터넷의 보급 이래로 전통적인 활자 매체의 권위가 작아진 대신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블로그와 SNS, 심지어 영상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투고할 수 있게 된 오늘날에는 더더욱 감추는 일 없이 신랄한 글이 넘쳐 흘러야 마땅하다고 믿는데, 막상 어느 여행지나 축제, 상품 등에 대한 글을 찾아보면 호평 일색이다. 어디든 좋지 않았다는 내용이 없다. 모든 여행지가 '인생 여행지'이고 모든 음식점이 '인생 맛집'이며 심지어는 모든 와인이 '인생 와인'이다. 어떤 글은 교묘하게 사실은 광고임을 감추고, 어떤 글은 좋았다는 말 뒤에 사실은 이러저러한 단점이 있었다는 내용을 감추어 두고 예민한 독자가 알아차려주기만을 기다린다. 후기에 좋은 말만 적지 않으면 업주가 후기 작성자에게 때로는 상냥하게,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범죄의 영역에 걸칠 정도로 격렬하게 내용 수정을 요구한다는 속설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보복'이 두려워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적지 못한다니 민주주의적으로 들리지는 않지만, 나 역시 그냥저냥 무난한 음식을 먹었음에도 스티커 붙은 캔 음료 하나 때문에 배달 앱에서 별점 5점을 찍은 사람이므로 비난을 할 생각은 아니다. 


내가 굳이 존경하는 소설가까지 끌고 들어와서 이렇게 장황한 서두를 적는 이유는, 이미 짐작하셨다시피 앞으로 여러분이 읽게 될 7박 9일의 보르도 - 남프랑스 와인 기행문이 호평 일색도 아니거니와 와인 상식이 없는 사람이 와인 기행에 나서면서 피어오른 갖은 불평과 투정, 근거 없는 추정, 짧은 지식으로 이해하려다가 포기한 흔적, 시차와 잦은 숙소 변경에서 기인한 피로감이 여기저기 묻어난 물건이기 때문이다.


출발하기 전 내가 와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저건 빨갛고 이건 하얗고 그건 탄산이 들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심지어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한다. 내가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들은 내가 와인 기행에 나섰다는 말에 놀라서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카카오톡 채팅창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난무했다고만 해 두겠다. 심지어 프랑스는 초행길이었다. 첫 프랑스 방문에서 보르도를 베이스캠프 삼기로 했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대단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진심으로 감탄해 대단하다고 했지만 일부는 약간 비꼬는 의미에서였다) 어떤 사람들은 대체 어째서 그랬냐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나도 내가 왜 와인 기행을 나섰는지 잘 모르겠다. 절반은 어릴 적부터 와인과 연관지어 갖고 있던 환상에 따른 허세 때문이었을 것이고 절반은 여행길에 먹게 될 프랑스의 수많은 맛좋은 음식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왜 프랑스에 왔는가 하는 의문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끝난 후 제법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으나, 적어도 여행을 시작한 뒤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는 나는 더 이상 그 의문을 떠올리지 않았다.


월리스는 1995년 <하퍼스>지의 의뢰로 캐리비안 해 7박 크루즈를 다녀왔고, 이듬해 1월 '출항: 호화 크루즈 여행의 (거의 치명적인) 안락함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장편 에세이를 게재했다. 이 에세이에서 내가 매우 좋아하는 대목이 있다.


어떤 글이 독자를 잘 섬기든 말든, 에세이가 기본적으로 섬길 대상은 독자로 가정되어 있다. 독자는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에세이를 읽을 때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글을 대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정말로 아름답고 독창적이고 강력한 광고라도 (그런 광고는 쌔고 쌨다) 진정한 예술은 될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이다. 광고에는 선물로서의 지위가 없다. 즉, 광고는 대상으로 삼은 사람을 정말로 위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만든 선물에 대해서 양가감정을 갖는다. 시간과 정성을 쏟아 나를 위해 직접 만든 물건에는 분명 사온 것과 비견할 수 없는 감동이 있지만, 슬프게도 집에서 손수 만든 무언가가 시판하는 제품보다 퀄리티가 높지는 않은 일이 왕왕 있다보니 마냥 즐거운 기분으로 받지만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손수 빚은 남프랑스 와인 기행문은 비록 매끈하게 잘 빠지지도 못했고 어딘가 애매한 구석이 한 문장 걸러 눈에 띄지만, 남프랑스 여행이나 보르도 지역의 와인, 혹은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있는 먼 곳의 친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적었다. 이 글이 읽는 분에게 선물이 되기를, 그래서 읽는 분을 최선을 다해 섬기기를 바란다.


보르도로 가는 길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서 환승해 보르도까지 1시간 가량을 더 비행하는 일정이다

한국에서 보르도까지는 직항 항공편이 없다. 먼저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까지 간 뒤 보르도까지 이동해야 한다. 철도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은 TGV를 이용할 수도 있고, 나처럼 국내선을 이용해 다시 보르도 공항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에어 프랑스를 처음 타 보았다. 기내에서 샴페인을 제공하고 간식으로 메로나를 준다는 후기는 진짜였다. 와인 기행을 나선 주제에 술이 약하고 즐겁게 마시지도 못하는 나는 샴페인 대신에 레드 와인을 달라고 했다. 한 뼘만한 작은 와인병을 통째로 주는데, 뜻밖에도 이 저렴하게 생긴 까베르네 소비뇽이 맛이 있었다. 과일향이 나고 가벼운 맛이라 신기해하며 마시는 사이 한 병이 비었다. 그렇게 과음한 결과, 제자리에서 헤드뱅잉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깼다 하느라 하마터면 승무원이 나누어주는 메로나를 먹지 못할 뻔했다. 녹아 흐르는 메로나를 먹어치우고서도 간식이 부족해 비행기 뒤쪽에 가 보았다. 에어 프랑스는 승무원이 간식거리를 시간 맞추어 들고 다니거나 호출을 받아 가져다주는 대신 뒤쪽 공간에 자리를 마련해 두고 작은 프레첼이며 견과류 봉지를 잔뜩 쌓아둔다. 음료도 모두 그 곳에 있다. 그렇게 두면 다들 먹고 마시느라 바구니가 텅텅 빌 것 같겠지만 의외로 승객들은 합리적인 수준으로만 챙겨 갔다. 욕심껏 여러 봉지 주워갈까 하다가 시험 삼아 하나만 먹어보니, 다들 한두 개만 집어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에어 프랑스에는 기내 엔터테인먼트가 놀랍도록 많이 탑재되어 있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예능 프로그램이 수백 편이 넘어서 처음에는 좋아했는데, 하나하나 뜯어보니 한글 자막은커녕 영문 자막도 흔치 않았다. 내가 파리행 비행기에서 가장 재미있게 본 영상물은 에어 프랑스의 기내 안전 안내 동영상이었다. 비꼬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에어 프랑스 기내 안전 비디오는 정말로 잘 만들었다. 시크하고 우아한, 그야말로 상상 속의 파리지앵다운 말투와 표정으로 전자기기 사용 금지와 흡연 금지를 말하며 발레리나 같은 몸짓으로 비상등 켜진 복도를 지나간다. 대단히 미학적이고 매력적이지만 비행기 탑승 후 며칠이 지나면 모델이 예뻤다는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동영상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대한항공에서 SM엔터테인먼트의 아이돌을 대거 기용해 개편한 기내 안전 비디오를 볼 일이 있었는데, 나는 분홍색 곰인형 마스코트가 구명조끼 입는 법을 랩으로 선창하고 어린이들이 따라하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어린 여자아이가 'ADULT'라고 적힌 구명조끼를 걸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크게 웃어버려서 본의 아니게 주목을 받고 말았다.)


기내 간식으로 메로나를 제공하는 에어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서 보르도 행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약 2시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샤를 드골 공항이 워낙에 크고 동선은 고양이가 갖고놀다 뭉쳐 놓은 털실마냥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는 주제에 안내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공항이야 세계 어디를 가든 특별히 반짝거릴 구석이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동경을 품는 파리 역시 샤를 드골 공항에는 아무런 낭만도 없다. 이번 와인 투어를 조직하고 7박 9일 동안 인솔자 역할을 해 주실 대표님 (이 글에서 언급해도 되는지 여부를 미리 여쭤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분에 대한 말은 아끼기로 한다)은 건축에 조예가 깊은 분이라 샤를 드골 공항의 건축적인 특징과 의미, 상징성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셨지만 방금 전까지 비행기에 갇혀 있다 풀려난 내 귀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현지의 은근한 매력에는 관심이 없는 관광객처럼 일단 스타벅스로 달려가 커피부터 한 잔 샀다. 프랑스 스타벅스는 맛이 없었다. 다행히 그 직후 라 메종 뒤 쇼콜라에서 오랑제뜨 (오렌지 껍질을 설탕에 절여 초콜릿을 입힌, 나는 이 표현을 싫어하지만, 내 '인생 초콜릿'이다)를 사고 폴 베이커리에서 까눌레를 사면서 기분이 나아졌다. 나중에 보르도 - 파리 순으로 이동할 때 그렇게 국제선 수속 줄이 길고 단 한 명 뿐인 직원이 다른 공항 직원과 잡담을 하면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느라 수백 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서 (비행기 시간에 늦어 발을 동동 구르는 환승객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는 꿋꿋이 옆에 선 여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손으로는 문자를 하기에 바빠 여권을 내밀고 코앞에서 보딩패스를 흔들어도 한참을 들여다볼 생각도 않았다. 그가 집에 가는 길에 그 최신형 아이폰을 떨어뜨려서 액정이 박살났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짧은 환승 시간을 날려먹을 줄 알았더라면, 그래서 이미 모든 승객이 탑승을 마쳐 텅 빈 게이트를 향해 전력질주를 하는 불상사를 겪게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이 때 샤를 드골 공항에서 저렴하게 팔던 쿠스미 티와 마리아쥬 프레르의 차를 사둘 것을 그랬다. 여행 후 친지와 지인들에게 마땅히 선물할 기념품이 없었던 게 다 그 아이폰 중독자 때문이다.


단것을 우물거리며 뇌에 행복감을 공급하는 사이 보르도 행 비행기에 오를 시간이 되었다. 한 시간 남짓한 비행에는 특별할 것은 없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며 프랑스 땅의 정취를 느꼈다고 하고 싶지만, 내 자리는 창가 자리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에어 프랑스의 매력적인 기내 안전 안내 동영상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것만이 그 비행의 유일한 감상이다.


오늘의 프랑스어 한 마디


프랑스어는 7-8년쯤 전에 두 달 배운 게 전부다. 기억나는 거라곤 봉쥬르, 메르씨, 윈느 바게뜨 실부쁠레 정도. 그렇지만 어른이 되면 비록 어린아이들처럼 언어를 빠르게 습득하지는 못해도 요령이라는 게 생긴다. 눈치껏 알아듣고, 눈치껏 전달할 수 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프랑스에 발을 디뎌본 결과 현지에서 주워온, 누가 여행을 가더라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프랑스어 한두 마디를 매 화 끝마다 공유하기로 한다.


로 쁠라 (L'eau plat): 생수

로 뻬띠양뜨 (L'eau pétillante): 탄산수


굳이 고급 음식점에 가지 않더라도 상당수의 음식점들이 어떤 물을 마실 것인지를 물어본다. 직원이 물병 두 개를 들고 와서 하나씩 흔들며 뭐라고 물어본다면 취향껏 대답해 보자.


아래 사진은 보르도 여행 중 가장 많이 마셨던 생수 브랜드 "아바띠으"로, 빨간색이 탄산수이고 파란색이 일반 생수이다. 개인적으로는 음식의 진한 맛을 잘 씻어내려주는 탄산수를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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