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말고, 프랑스 (3) 메독 종단 드라이브
보르도 시내에서 출발해 와인 박물관 라 시떼 뒤 뱅La Cité du Vin을 방문한다. 이어 이번 남프랑스 와인 기행의 1번타자 샤토 퐁테 꺄네Chateau Pontet-Canet를 향한다. 바쥬Bages 마을의 까페 라비날Cafe Lavinal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샤토 피숑 바롱Chateau Pichon Baron을 견학한다. 저녁식사는 보르도 시내에서 내키는 곳을 찾아가기로 한다.
내가 알고 있는 포도밭의 이미지는 머리 위까지 지지대가 설치되어 덩굴이 기어 올라가 그늘을 이루는 가운데, 마치 여름 등나무꽃처럼 크고 탐스런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풍경이었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는 그렇게 재배하지 않는다. 가지를 아주 낮게 유지함으로써 포도나무가 잎 혹은 줄기에 집중하는 대신 열매에 양분을 모으게 하고, 포도가 거의 땅에 닿으리만치 낮게 관리한다. 아무리 높아봐야 가슴팍까지도 오지 않는 포도나무에 그대로 뒀다간 무게를 못 이겨 바닥으로 쏟아져 버릴 것만 같은 손톱 만한 포도알이 발목 높이로 가득 매달려 있다. 그런 포도나무가 수천, 수만 녹색과 검푸른색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척박하고 거친 메독Médoc의 자갈밭에서 자라는 블루베리 닮은 열매, 메독의 자랑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다.
한국에서 국도를 달리면 시야 어느 끝자락이건 반드시 언덕이나 산이 걸린다. 눈앞에 수평선을 하나 긋고 그 위로는 아무런 자연 지형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국내에 과연 존재할까 의문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도 대표적인 농업국가이자 곡창지대인 프랑스는 다르다. 산맥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은 지역을 달리면, 특히 메독처럼 평지만 이어지는 지역을 달리면 산은커녕 언덕 하나 보기도 힘들다. 메독 최고의 고지대는 해발 45미터 (킬로미터를 잘못 쓴 게 아니다)이다. 무시무시한 경사를 자랑하는 산중턱의 포도밭에서만 빼어난 와인이 난다는 편견을 깨 주는 좋은 예이다.
메독이 얼마나 포도 농사가 잘 되는지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다섯 개 뿐인 그랑 크뤼 1등급 와인 생산지 중 네 곳이 메독에 자리를 잡고 있다. 농사가 잘 되는 땅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달리 땅은 거칠고 건조하다. 바닥을 내려다보면 온통 자갈과 모래, 건조해 푸슬푸슬 날리는 회색 진흙투성이이다. 잠시만 드라이빙을 해도 자동차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더러워진다. 흙먼지를 날리며 사방 어디를 보아도 포도밭 뿐인 메독을 달리면 처음 한 시간 정도는 경이로우며, 그 다음 한 시간 정도는 이 많은 포도가 다 와인이 된다면 대체 1년에 얼마나 많은 와인이 세상에 풀리는 걸까 생각이 들고, 그 후로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일자로만 이어지는 지평선과 지치지도 않고 등장하는 포도밭에 질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오전에 보르도 와인 박물관인 라 시떼 뒤 뱅La Cité du Vin을 방문한 뒤 메독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뽀이약Paulliac으로 올라갈 참이었다. 막 개발이 한창인 보르도 북부, 힙한 그래피티가 고전 유럽풍 건물 벽을 뒤덮고 젊은이들이 푸드 트럭 앞에 줄지어 선 바꺌렁Bacalan 지역에 자리잡은 라 시떼 뒤 뱅. 건축적으로는 와인 디캔터를 형상화한 형태라고 하며 내 눈에는 일부 짓다 만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양한 인터랙티브 와인 체험 및 교육 전시물이 있어서 나름의 기대를 걸고 도착했는데, 박물관 오픈 시간이 10시였고 이번 와인 기행의 첫 행선지 샤토 퐁테 꺄네의 방문 예약은 11시 30분, 보르도에서 뽀이약까지가 자동차를 아무리 전력으로 밟아도 1시간이 걸리는 거리라는 것을 감안하면 라 시떼 뒤 뱅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라 시떼 뒤 뱅의 직원은 매우 자랑스러운 얼굴로 상설전시만 다 돌아보아도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거라고 장담했다 (돌이켜 보니 우리를 내쫓고 싶었던 건지 라 시떼 뒤 뱅의 알찬 전시 내용을 자랑하고 싶었던 건지 애매하다). 상설 전시와 8층 벨베디어에서의 와인 시음까지를 포함한 티켓이 사전 예약 시 20유로이며, 공식 홈페이지에서 미리 구매해 갈 수도 있다.
라 시떼 뒤 뱅을 등지고 샤토 퐁테 꺄네가 위치한 뽀이약까지 달려 올라가기 시작한다. 뽀이약 부근은 메독에서도 오메독Haut-Médoc이라고 부른다. 뽀이약 뿐만 아니라 생떼스떼쁘St-Estèphe, 마고Margaux, 생쥘리엥St Julien, 물리Moulis, 리스트락Listrac 등 와인을 기웃거려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와인의 명산 마을이 이 곳에 몰려 있다. 대망의 와인 기행, 견학을 예약한 와이너리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다른 와이너리들도 기웃거린다. 그렇게 샤토 도작 Chateau Dauzac은 내 생애 처음으로 두 눈으로 본 와이너리로 이름을 올렸다.
대부분의 와이너리는 관광객에게 관대했다. 포도밭 앞, 혹은 정문 앞에 차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고, 아예 정문을 개방해서 포도밭과 주요 건물 일대를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는 곳도 있었다. 심지어 이후에 소개할 샤토 디켐 Chateau D'Yquem처럼 초고가를 자랑하는 와이너리도 콧대를 세우지 않아서, 샤토 디켐의 아름다운 정원을 실컷 구경하고 청포도밭을 거닐 수 있었다.
유일한 예외는 샤토 마고Chateau Margaux였다. 가로수가 우거진 진입로 언저리에 잠시 차를 대고 사진을 찍고 있자니 마침 트럭을 몰고 나오고 있던 직원이 차를 빼라는 것이었다. 사진 한 장만 찍고 갈게요, 라고 하자 그마저도 안된단다. 우리 일행은 얌전히 차로 돌아와 그 자리를 뜨면서도, 같은 그랑 크뤼 1등급이면서 관광객이 오건 말건 관심도 없는 샤토 무통 로쉴드나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와 비교를 하며 인심이 박하네, 밖에서 건물 사진 한 장 찍는다고 뭐가 닳기를 하나, 너희들 말고도 맛있는 와인집은 많네, 하고 몹시 궁시렁거렸다. 하지만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이전까지는 샤토 마고가 '못 먹는' 와인이었다면 이제는 '빈정 상해서 안 먹는' 와인인 척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곳저곳 유명한 와이너리를 기웃거려가며 갸론 강을 따라 바다로 바다로, 우리는 바이오다이나믹 순혈주의자 샤토 퐁테 꺄네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