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라니. 내가 초등학생이던 그 시절부터 항상 필수 독서 목록에 있던 책이었다. 아주 열심히 읽었고 저자의 모든 행보에 큰 감명을 받아 장장 7장짜리 독후감을 이미 초등학교 때 써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비야는 이런 장르의 여러 저서로 그 당시 여대생의 롤모델이 되었다. 인도고 아프리카고,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세계에 많은 이들을 배낭 하나만 둘러메게 하고 초대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키도 작고 질병 결석도 밥 먹듯이 하던 허약 체질 초등학생에겐, 본인과 정반대의 씩씩하고 겁도 없는 한비야가 더욱 멋있게 느껴졌을 것이다. NGO가 뭔지도 이때 처음 알게 돼, 꽤 오랫동안 그런 기관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을 품기도 했다. 원체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수첩에‘고산병 걸리기’를 당당히 적어놓기까지도 했다.
그렇지만 10년도 훌쩍 지난 지금, 이 책이 독서 목록에 포함된 걸 확인하고 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저자가 수많은 의혹으로 이때까지의 정황들을 의심받았던 것이 꽤 오래된 일이었다. 그런 건 차라리 차치하고, 이 책이 대학생이 읽을 만한 수준이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교수님께서 이 책을 독서 목록에 넣은 이유가 도무지 궁금했다. 알량한 궁금증에 10여 년 만에 다시 읽게 된 이 책이 조금은 다른 의미로 새로웠다. 내가 그다지 달라지진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가슴 뛰는 삶을 원하고 있었다.
꽤 오랜 기간 삶에 권태를 느끼고 있다. 20대의 단추를 잘못 꿰는 바람에 생긴 이 우울감도 여전하다. 이제껏 그려온 꿈은 적성이고, 현실적인 면이고 내 상황과 그다지 들어맞지 않았다. 지금까지 겪어온 삶도 여러모로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뒷바라지해주시기엔 나이든 부모님과 든 거 없는 주머니 사정에, 하나씩 포기하고 합리화하며 마주한 지금이 조금은 비참하다고 느껴왔다. 마음에 쏙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어진 배경을 탓하는 것이 참 없어 보인다고 늘 생각해 왔는데, 지금의 내가 그러고 있다.
어릴 때는 그랬다. 너무 현실적인 언니가 이상했다. 늘 도전하는 삶을 원했고, 역사에 족적 하나는 꼭 남기리라 다짐하던 나와는 전혀 달랐다.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는데도 집 근처 지방대 간호학과와 여러 교대에 원서를 냈다. 다행히 잘 풀려 유명한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꿈 많았을 어리디어린 고등학생이 목표하던 삶이 그저,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전부였을까. 지금 와서 보니 k-장녀 그 모습 그 자체였다. 이제야 그 삶에 겨우 공감하는 동시에 여전히 철없게 방황하고 있다.
이사를 한 번 정도 한 우리 집 책장에 이 책이 그때 그대로 꽂혀있었다. 내 성격과 가치관은 꽤 많이 변한 것 같은데도 얘만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다. 책의 진위나 작가의 논란은 빼고 책의 내용이 그저 사실이라 생각하며 한번 바라보자. 이토록 식은 내 마음에 다시 기름을 부었고, 이런 삶을 살지 못한 것에 질투가 나 묘하게 부아도 치밀었다. 남을 돕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어떤 어려움에도 당당한 것이 얼마나 멋있는 건지, 세계가 얼마나 넓디넓은지 또다시 느꼈다. 갑자기 고등학생 시절 친하던 친구가 생각났다. 세상이 궁금하다는 이유 단 하나로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은 세계지리를 수능 사탐 과목으로 선택했던 전교생 두 명 중 한 명이던 걔.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나였다.
“차 브레이크가 고장 났거든? 다행히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딱 멈추더라. 지나가던 현지인들이 도와줬어. 근데 정신 차리고 보니 카메라고 노트북이고 다 도둑맞았더라, 그래도 그냥 황당하기만 했어. 안 죽었잖아?” 어느 날 불쑥 세계여행을 떠났다가 불쑥 돌아와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황천길 갈 뻔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크고 맑은 눈이 예쁘던 그 친구의 눈빛이 그날따라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부러웠다. 나는 다시 가슴 뛰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겨우 20대 초반인 주제에 노인네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문득 느껴 열없었다. 그러나 마냥 질투만 일고 실행할 엄두는 나지 않으니 막을 수도 없는 생각이었다. 다시 본 책 속의 한비야에게도 친구에게 들었던 이 엇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여전히 소년 같았고, 어려움에 그저 직면하고 상황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게, 한비야도 언젠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던 것 같다. 책 속에서도 직접 언급한 내용인데, 처음 긴급 구호활동을 하겠다 결심하고 맛보기로 향했던 케냐에서 한비야는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오지의 유명 의사에게 부러움을 느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언젠가, 왜 긴급구호 활동을 하게 됐냐 물어본 질문에 한비야 역시 “가슴이 뛰고 피를 끓게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고 이야기했다. 누구나 이런 시기를 지나기는 하나 보다. 다시 가슴 뛰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이 또다시 부끄러워졌다. 누구나 한번은 지나는 시기를 겪는 것인데 또 나만 엄청 힘든 것인 줄 알았다. 한비야가 ‘가슴 뛰는 일’을 하게 된 것도 서른이 훌쩍 넘어서였다. 지금의 내 나이가 도전하기도, 현실과의 타협이 절실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지만, 고작 누군가의 삶을 동경하고 부러워만 하는 데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시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제는 이 ‘가슴 뛰는 일’의 정의를 새롭게 써봐야 할 시기에 다다른 것 같다. 누군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설렘도 계속되면 심장병이라고, 새로움과 짜릿함만 ‘가슴 뛰는 일’이라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위험함이 존재한다. 밍숭맹숭한 일상에서 나만의 새로운 ‘가슴 뛰는 일’을 찾아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도전과제로 삼아야겠다.
남을 돕는 일이야말로 시시한 인생 속의 도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예전에도 책을 읽으며 누군가를 돕는 삶이 멋지다고는 생각해 왔지만, 단순히 생각에만 그쳐왔던 것 같다. 지금껏 꽤 많은 봉사활동을 해왔지만 그중 순수하게 봉사활동, 그 목적만으로 했던 봉사가 몇이나 있었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친구들 등쌀에 끌려갔던 농활이나, 장학금이 제법 쏠쏠했던 교육 봉사활동, 자소서에 한 줄 적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시작했던 여러 종류의 봉사활동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목적이 어찌 됐든지 그 안에서 그것만의 무언가를 느껴오기는 했으나, 콩고물이 탐났거나 떠밀리듯 시작한 것들이 전부였다.
오히려 남을 외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하도 한가운데서 동냥하는 노숙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기를 썼고, 온갖 봉사단체에서 권하는 서명도 핑계로 뿌리쳤다. 늘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삶을 살아볼 기회가 항상 내 옆에 사소하게 존재했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 왔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고, 모두 이렇게 한다고 스스로 주변과 비교하며 합리화했을 뿐이다.
돌아보니 작은 것들은 그다지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 내 이상향을 한비야에게 맞춰두고 나는 왜 이렇게 하지 못할까 후회하면서 살아온 게 전부다. 꿈을 크게, 높게, 넓은 곳에 맞춰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 대의를 찾는 것 역시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는 그 누구라도 빛나는 법이다. ‘온갖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는다. 무시와 핍박은 뜨겁고 쿨하게 받아치는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 가난과 전쟁, 굶주림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국제구호활동가.’그녀를 설명할 장황한 이야기가 우리나라 고대 영웅 소설의 서사 같기도 하다. 이것은 한비야의 위치지, 내가 닿아야만 할 곳일 이유가 없다.
이 책이 독서 목록에 있는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한 명쯤은 어린 시절에 꼭 읽었을 법한 책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그저 멋있게만 느껴졌다면, 오늘은 완전히 다른 가치를 찾게 됐다. 책을 읽는 것은 그래서 재밌는 일이다.
스스로 던졌던 ‘다시’ 가슴 뛰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도 “언제든 그럴 수 있다”라고 대답을 하고자 한다. ‘다시’라는 말을 했다는 건, 어릴 때의 삶이 가슴 뛰었다는 것이고, 그 당시에도 거창한 것은 당연히 할 수 없었다. 그저 꿈꾸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삶을 살아왔던 것에 불과하면서 가슴 뛰었다고 느낀 것이다. 그 당시‘가슴 뛰는 삶’의 정의를 ‘꿈꾸는 삶’으로 내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정의를 바꿀 때에 다다른 것일 뿐, 내 삶은 이제껏 가치 없지도, 멎어있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