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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Jun 26. 2021

불편해서 불편합니다.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몇 달 전, 언니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결혼식만큼은 절대, 절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예식장 공간과 그 속의 사람들이 전부 이상하고 어색했다.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 하나 확실한 건 맨날 지지고 볶고 싸우던 언니와의 애틋함이나 싱숭생숭함, 단지 그런 종류의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두꺼운 화장을 얹은 채로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 언니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내가 알던 언니가 아니란 건 고사하고, 그냥 사람 같지도 않았다. 언니의 친구들은 부케를 든 손 모양부터 표정까지 하나하나 지적했다. 언젠가 뵌 듯 만 듯한 엄마 지인들이 원숭이 구경하듯 대기실 앞에 몰려오셨다. '얼굴을 고쳤네', '너무 마르네', 어쩌네, 면전에서는 하지도 못할 말들을 잔뜩 떠들고 가셨다. 얼렁뚱땅 시작된 식은 더 가관이었다. 발 한번 내디딜 때마다 드레스샵 이모님은 긴 드레스 자락을 이리저리 만지느라 바쁘셨고, 눈물을 흘리면 달려와서 화장을 고쳐주셨다. 결혼식만큼 길었던 포토타임 때는 신부 독사진은 찍었지만, 신랑 독사진은 촬영하지 않았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기 때문이란다. 여기서 ‘주인공’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결혼식 현장에서는 우리 언니가 얼마만큼 똑똑한 사람인지, 사회에서 어떻게 인정받고 있는지 따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겉모습만이 언니를 설명하는 전부였다. ‘여성성’으로 불리는 그 모든 것을 껴입고 ‘여자답게’ 있으면서 기꺼이 평가의 대상이 됐다. 코르셋의 총집합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날 느낀 그 감정은 언젠가 일상 속에서 느꼈던 기괴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혼식만큼 코르셋의 전형이 똘똘 뭉쳐있는 사례가 많진 않지만, 많지 않을 뿐이다. 난 스스로 코르셋에 갇혀 살았고 그게 취미라고 생각했던 사람으로서 이 알 수 없는 기분에 늘 감겨 살았었다. 꽃무늬에, 레이스에, 짧은 치마를 좋아했지만, 그게 정말 내 취향이었을까. 숱 많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며 이게 편하다고 늘 이야기했지만, 머리 말리는 데만 십 분이 넘게 걸린다는 말은 왜 단 한 번도 한 적 없을까. 뚱뚱한 내 몸도 ‘아름답다’고 여겨야 한다는 생각은 왜 했을까. 탈코르셋을 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선뜻 실천에 옮기진 않은 이유는 뭐였을까. 내가 했던 고민을 먼저 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로 위안은 얻었고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많은 여성이 탈코르셋 운동에 반감을 갖는 이유는 ‘주체적 꾸밈’이라는 단어와 생각 때문이다. 나 역시 꾸미는 것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탈코르셋을 ‘강요’하지 말라는 말에 꽤 격하게 동의했던 사람이었다. 예쁜 옷과 화장을 좋아하고 누군가 내 옷의 브랜드나 쇼핑몰을 물어봐 주는 걸 낙으로 살아왔다. 탈코르셋을 강요하는 건 내 취미를 방해하고 간섭하는 주제넘은 행동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에 살이 급격하게 찌고 만사가 귀찮아지면서 이런 껍데기를 벗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내가 해왔던 것이 노동임을 깨닫게 됐다. 이렇게 편하게 사는 방법이 존재하는데도 자기만족이라고 자위하면서 노동을 감내해 왔다. 이런 내 경험담에도 ‘나는 달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미 예전에 내가 겪었듯이 말이다. 그럴 땐 꾸미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무인도에 있더라도 꾸밀 것인가? 이 질문에서 한 번 걸러지겠지만, 그럼에도 남들의 시선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저 자기만족이라는 대답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만족은 어디에서 오는가? 적어도 나는 누군가 예쁘다고 칭찬해주는 게 좋았다. 내 옷차림에 관심 가져 주면 괜히 으쓱해졌다. 내 평범한 외모가 소위 ‘하타치’처럼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만족했다. 이걸 ‘자기’만족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철저히 남들의 평가로부터 만족감을 얻었다. 


  때문에 탈코르셋은 다른 이유로 불편하다

  여성들이 규범적 여성성에서 벗어나는 걸 바라지 않는 사회는 자꾸만 눈치를 준다. 한 카페 아르바이트 면접에서처럼 꾸미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고, 어떤 영화관의 규범처럼 꾸며야 할 의무를 던져준다. 탈코르셋은 이런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회운동이지, 개인의 취향과는 관련이 없다. 단지 개인적인 편안함을 위해서 머리를 자르고 편한 옷을 입는 것은, 그저 편안한 스타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사회운동이기 때문에 또 다른 불편함이 따르고 감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불편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불평해서는 안 되며 어느 정도 강제성이 따라야 한다. 예전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을 읽으면서, ‘어떤 방식이든지 페미니즘을 주창하면 된다’라고 책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던 생각이 나서 창피하다. 당시에는 리버럴이니, 래디컬이니 논쟁 자체가 우습게 느껴졌고, ‘여성해방’을 이야기하면서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건 인권존중이라는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논리를 거스른다고 생각했다. 규범적 여성성을 탈피하려는 시도는 단순히 개인의 행동만으로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당장 내가 받을 괄시가 더 두려웠던 것 같다. 사실 이처럼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쉽게 코르셋을 놓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다. 한때 좋아했던 뷰티 유튜버도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음에도, 여전히 뷰티 콘텐츠로 활동하고 있다. 이 유튜버는 코르셋을 조장한다고 지탄하는 사람들에게 ‘속도의 차이가 있다’라며 탈코르셋으로 오히려 코르셋을 씌우고 있지 않냐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 유튜버의 모든 행보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이 부분은 우려가 되기도 한다. ‘탈코상’이 만들어지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남 눈치를 보지 않을 차림새’라고 정의하기에는 탈코르셋의 본래 의미와는 멀어지고, 어떤 하나로 정하는 것은 또 그 나름대로 올가미가 된다. 논의가 분명 필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주체적 꾸밈?

  여전히 주체적 꾸밈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다. 이 책의 인터뷰이 윤주는 “옷에 대한 취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규범적 여성성을 구현하는 꾸밈과 무관하다. 그간의 노동이 온전한 취미의 영역으로 축소됐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어쩌면 주체적 꾸밈을 옹호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규범적 여성성과 관계없이 꾸미는 것이기 때문에 꾸밈노동이 아니라면, 정말 어떤 꾸밈이든 자신이 노동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꾸밈노동이 아닐 수 있지 않을까? 고등학생 때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당시 나는 수능을 보기 전까지는 늘 화장을 하고 등교를 하다가, 수능을 본 이후에는 아예 씻지도 않고 학교에 갔다. 화장을 하고 다닌 이유는 그냥 재밌었기 때문이다. 이 재미의 이유 중 하나가 남들이 좋은 평가를 해주는 게 듣기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수능이 끝났다고 남들이 평가질을 멈추는 것은 또 아니니 외모평가에 크게 매몰돼 있진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내게 꾸밈은 그저 스트레스를 해소할 취미에 가까웠다. 물론 그다지 건강하지도 않고 권장할 만한 취미도 아니지만, ‘주체적 꾸밈’이 있다, 없다를 따진다면 있다고 볼만하지도 않은가? 주체적 꾸밈에서 ‘주체’를 상기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울 필요가 없으니, 아름다움이 다양할 필요도 역시 없다.

  앞선 이유 외에도 탈코르셋은 아직 분명히 허점이 있다. 자기 몸 긍정주의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몸 긍정주의가 탈코르셋의 토대로 깔려있다면, 이 이상 더 나은 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기 몸 긍정주의’, 참 좋은 말처럼 보이기는 한다.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라는 말에 혹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아름다워야 하는가? 자기 몸 긍정주의는 ‘있는 그대로’가 아닌 ‘아름답다’라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여전히 미를 이야기하는 것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탈코르셋 운동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에 더 집중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 인간의 꼴을 하고, 평가의 대상으로서, 혹은 눈요깃거리로서 소비되지 않을 방안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 긍정주의를 그저 낙관적으로만 바라보면 안 된다. 사실 ‘자기 몸 긍정주의’를 포털에 검색해 보면, 이를 생산하는 주체가 피부과, 성형외과, 속옷 브랜드, 여성지 등 기존에 코르셋을 만들고 퍼트리던 주체와 같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름다움을 여전히 ‘여성의 욕망’으로 규정하면서 건강한 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다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다양할 필요도 역시 없다. 


  끝으로

  이 모든 논의에 동의하고 통감한다, 오랫동안 정리 못 한 내 생각을 긁어모아 준 것 같아 참 속 시원한 책이기도 했지만, 난 아직도 긴 머리를 동여맨 채 글을 쓰고 있다. 내가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할까? 내가 이런 이야기들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놓을 수 없는 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젊은 날의 아름다움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싶다가도, 내 편한 차림새에 못내 속상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또 어떤 이유가 있진 않을까. 남들이 페미니스트라고 ‘수군수군’거릴까 봐 두려웠던 건 아닐까. 특히나 연대하고 행동하지 않더라도 페미니스트라 느낄 수 있는 달콤한 말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논리적으로 다가온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에서 이야기하듯.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고 어떤 방식이든 개선의 의지만 있다면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고만 생각해 온 것이다. 이 책은 이런 개념을 부정하며 연대를 촉구한다. 

  나는 탈코르셋으로 사회적 처벌을 받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처벌받고 있다. 여전히 내 스탠스를 정하기에 나는 너무 비겁하다. 불편해지길 원하지 않아서 불편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단 하나 있다는 것은 기억해두려 한다. 언젠가 탈코르셋을 한 모습으로 당당히 마주할 수 있길 스스로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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