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판판한 기사글이나 많이 배운 사람의 시선으로 대중문화 현상이나 사회현상을 해석해둔 책을 좋아한다. 그저 책 읽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아서 생긴 취향에 불과하다. 시간 내어 어거지로 읽는 글이라면, 무엇 하나 꼭 배울 수 있기만을 단지 바랐을 뿐이다. 이 말을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소설은 좀처럼 읽지 않는다’,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처음 보는 새로운 단어나 표현법에만 눈을 맞추며 읽는 게 소설이었다. 특히나 로맨스 소설은 몇 장을 채 못 읽고 입맛이 뚝 떨어지곤 했다. 절절한 문장에 배어 나오는 감성이 나완 맞지 않았고, 곧잘 부풀러 오르는 내 감정선은 책에 ‘역’과몰입하며 소설 속 주인공들을 질책하는 데 쓰였다.
그런 내가 굳이 국문과 전공, 굳이 한국 현대소설 수업을 수강했다. 언어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가끔 언어학과가 있는 다른 대학에 갈 걸 후회하곤 했는데, 국어국문학과를 그 대안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었었다. 복수전공을 결정하기 전에 제일 관심 없는 분야에 먼저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선택한 수업이었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처음 만난 것도 이 수업에서였다.
수업 교재 중 하나던 <올해의 문제소설>에 실린 여러 작품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글은 <재희>였다. 흥미를 붙이고 진도를 쫓아가기도 바빴던 수업이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재희>는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잘 읽혔다. 추측해보건대 정신을 우리하게 만드는 퀴어 문학 특유의 성적인 표현이 적었다는 점, 퀴어 문학에서는 찾아보기조차 힘든 헤테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점이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썼던 서평에도 이 소설의 형식과 내용에서의 문학적 접근보다도 오직 내 관심 분야인 여성 문제에 더 집중했던 게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덕분에 C+ 하나 없던 내 성적표에 오점을 남길 뻔했다가 교수님의 넓은 아량으로 겨우 B를 받았고, 또 그 덕분에 복수전공 생각을 싹 달아나게 했던, 그런 애증의 작품이 그의 <재희>기도 했다.
시간이 흘렀고 그는 어느새 세계적인 문학상인 부커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작가가 됐다. 작품 하나 읽어본 게 고작일 뿐인데 내가 키운 것마냥 뿌듯한 감정이 드는 게 꽤 우스웠다. 유명한 작가님의 책을 안 읽어볼 수는 없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재희>와 그렇게 재회했다.
이 소설집에서도 ‘최애’는 역시 불변의 <재희>다. 여전히 로맨스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와는 달리 재희와 영이 각자에게 느낀 사랑의 종류가 궁금해졌다.
그들이 특별한 관계가 된 것은 딱 들어맞는 독특한 가치관 덕분이었다. 남자를 밝히는 호모 남성과 헤테로 여성. 덕분에 친구가 됐고, 덕분에 동거인으로서 가족이 됐다. 친구로 맺어지게 된 계기도 남자였지만, 그들이 멀어진 계기도 남자였다. 나이가 들고 매우 보편적인 여성의 삶을 살아가게 된 재희에게도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생겼다. 영은 그들 두 사람의 관계 전진을 위해 아웃팅 당했다.
아웃팅을 당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영은 자신과 재희가 생각보다 꽤 다르다는 점에서 큰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게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라고 생각한 재희네는 영의 생각보다 부유했을지도 모르고, 자신과 비슷한 면면을 가졌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한 재희는 생각보다 여러모로 평범했다. 그동안의 재희 행동이나 결혼식 당일에 있던 재희의 행동은 커다란 결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은 오히려 재희와 영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화룡점정 같은 부분이었다.
동질감에서 시작한 그들의 사랑은 가족보다는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그런 감정으로 해석된다. 재희의 결혼으로 그게 완벽히 깨어지고 그들이 다시는 그때 그 찰나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우정과 가까운 정의 형태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재희의 존재가 소설집의 다른 작품에도 친구로 언급되고 있어서 내린 확신이다. 과연 연작소설의 묘미다.
<재희> 외 다른 작품도 물론 좋았다. 죽었다 깨어나도 언론학도에겐 무엇보다 단순한 로맨스로만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일 좋았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는 퀴어들이 겪는 고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동성애자인 영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영의 엄마 이야기가 다소 클리셰에 가까웠다면, 영의 애인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운동권 끝물에서 문과대 회장이라는 나름대로 중차대한 직책을 맡았던 그는 그때 그 시절을 아직도 살아가는 듯 보인다. 여전히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거나 남들은 관심도 없을 외세에 대한 과한 경계심, 그리고 그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까지. 그도 분명한 피해자다. 영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하는 애인에게 분노가 일었지만, 사과는 엄마에게 받고 싶다고 말했다. 구조의 폭력을 영도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선 에이즈를 이야기한다.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는 방식으로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해댄다. 엄청난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만난 규호였지만, 결국은 에이즈, 카일리가 발목을 잡는다. 규호는 둘의 공간이었던 서울과 방콕에 머물지 않고 일을 위해 상하이로 떠나지만, 영은 카일리 때문에 상하이 장기 체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 사이는 마무리됐대도 다음 작품인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여전히 규호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쩌면 사랑 그 자체만을 주제로 한 유일한 작품이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단순한 로맨스로 귀결되는’ 글이었지만, 가장 몰입감이 뛰어난 작품이었다. 연애라는 초미시적인 인간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어떤 사회 문제를 함께 서술하는 것만큼, 외부 요소를 배제하고 온전한 집중력으로 끌어가는 것도 훌륭한 방식이라는 것을 이 작품에서 그런대로 느끼게 됐다. 나와는 몇 광년은 멀리 떨어졌다 생각한 그들의 방식에서 나의 역사를 찾게 된다는 점도 꽤 거지 같고 좋았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그 어떤 것보다도 공감을 사기 좋다는 점이 아무래도 로맨스 소설의 특장점이라는 걸 인정하게 됐다.
이 소설이 전반적으로 마음에 쏙 들었지만, 그럼에도 미디어가 재현하는 퀴어에 대한 이야기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모든 사람의 사랑 방법과 형태가 같진 않을 것이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래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기도 한다. 그런데 퀴어 문학에서 재현하는 그들의 사랑 방식은 어쩐지 획일화돼 있다.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정조 관념이 희박한’ 그 상태 말이다.
대표적으로는 에이즈에 대한 오해다. 에이즈의 원인이 단지 동성애가 전부가 아니지만, 몇몇의 사람에겐 완벽히 해명되지 못한 문제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에이즈를 독창적 별명 짓기라며 ‘카일리’로 칭해 담담하게 풀어나가기도 했지만, 이게 더욱 먹먹하게 그려지며 비극성을 더 자아냈다. 규호와의 사랑에서 결국 장애물이 된 것도 그의 카일리였지 않은가. 그들의 현실을 그리는 것과는 별개로 개인의 현실이 보편적인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작품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동성애자를 생각하는 보편적이며 부정적인 인식을 가감 없이 그냥 재현하고 있다. 작가 본인이 퀴어니, 그들의 사랑을 더 잘 알기 때문에 당사자가 아닌 나의 이런 첨언은 훈수나 다름이 없겠지만, 굳이 싶은 묘사는 지양해야 한다는 게 어찌 됐든 내 의견이다. 문학의 관점이 아닌 사회적인 관점에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우리의 얘기를, 나의 얘기를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에 녹아있듯, 이 소설은 지대하게 긍정적인 의미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수업을 들었던 당시 <올해의 문제소설 2019>에는 퀴어소설이 제법 있었지만, 2022년에 발간된 <올해의 문제소설>은 그렇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분명 더 이상 이들의 이야기가 한국 문학의 지평에 충격을 자아낼 만한 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뜻도 내포돼 있다고 본다. 더없이 좋은 변화다.
이 소설집의 모든 작품의 주인공 ‘영’은 누군가와 많이 닮아있다. 이름도, 전공도, 체격도, 직업도. 그는 분명히 허구를 짓고 있지만, 또 명백히 그들의 이야기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기도 했다. 그들의 사랑이 인정이나 이해의 영역이 아닌, 조심스럽지 않은 취향이 되길 바라면서 작가의 또 다른 책 하나를 더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