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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May 13. 2021

외모의 이데아

<뚱뚱해서 죄송합니까?>

‘154에 42. 살쪘다…….’

  중학생   일기장을 읽다가 발견한 충격적인 문장이었다. 세상에, 내게 저렇게 말랐던 시절이 있었나? 아니 무엇보다  몸무게에 살쪘다고 한탄이라니? 이제껏   인생에서 말랐던 나날은 한시도 없었다고 생각해 왔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선 나더러 ‘다이어트  해야겠다라고 말씀하셨고, 중학교 시절 친구들에겐 ‘코끼리 다리라고 놀림받았으며, 허벅지가 나보다 가늘던 예전 남자친구는 ‘통통해도 예쁘다라며 종종 뜬금없이 이야기했다.  누구보다 엄마께서 외모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셨다. 붙어산 날들이 많으니 당연한  같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예뻐하는 사람인데도 외모에서만큼은 차가울 만치 냉정한 평가를 하셨다. 엄마의  어떤  중에서도, 키가 크고 마른 큰언니를 주어로  이야기들이 제일 듣기 싫었다. 내가  몸에  맞아 보이는 옷을 입고 있으면 언니가 입으면 널찍하니 괜찮겠다고 말씀하신다든가, 너무 마른 언니를 걱정할   ‘수빈이는~’으로 말을 시작하며 언니와 지독히 비교해대셨다. 언니가 가진 수만 가지 장점보다 가는 허리와 또렷한 쇄골이  부러웠다. 그렇게 20년을 넘게 살았다. 내가 저체중에 가까운 몸무게에도 살쪘다며 눈물 흘린 이유는 온전히 외부 탓이었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은 압박감은  몸무게보다 무거웠다. 너무 오랫동안 살쪘다는 이야기를 들어와  외모에 대한  생각이 온전히 스스로에서 기인한다고 느낄 뿐이었다.  누구도  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릇된 인식이 싹트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내 외모를 지적해댄 그들도 분명 누군가에게 평가질과 비교질을 당하는 객체였을 것이다. 나 역시 어쩌고 저쩌고 말은 잘하지만, 분명 누군가에게 이런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이 무례하고 왜곡된 뫼비우스 띠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였을지는 당최 알 수가 없다. 다만 미디어의 영향력이 상당했을 것이라곤 확신할 수 있다. 매체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TV 속, 광고판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모습이다. 아줌마 역할을 해도, 외모로 차별받는 역할을 해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런 역을 맡을 수밖에 없다.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 배우 서현진이 맡은 역할이 대표적이다. 태어나서 저렇게 생긴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도 없는데, 평범한 외모라 다른 ‘오해영’과 비교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게 황당했다. 그러나 서현진이 맡은 ‘오해영’ 역할에 적합한 다른 여성 배우가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남성 배우와 다르게 여성 배우는 다양한 이미지의 배우가 적고, 있다더라도 우리가 자주 접하는 주연급 배우 중에서는 소위 ‘여배우’의 이미지가 뚜렷한 배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여성 배우에게 외모는 실력이자 경쟁력이 됐고,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검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

  미디어가 비추는 사회가 이토록 왜곡됐지만, 선망의 대상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의 기준마저 이들과 닮아가고 있다. 여초 커뮤니티에 퍼진 ‘다이어트 자극  아이돌과 배우, 모델들은 팔뚝만큼 가는 다리로 겨우 땅을 디디고  있는데도, 우린  말도  되는 몸매에 ‘자극 받는다.  기현상은 한참 연예인에 관심 많을 청소년마저 관통한다. 고등학생 , 축제 시즌이 되면 댄스 동아리 친구들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걸렀다. 친구들은 무대의상으로 크롭탑과  달라붙는 짧은 바지를 입어야 하는데 군살이 튀어나오니 어쩔  없다고 말했다.  해괴한 대답에 대단한 프로의식이라고 감탄했다. 공연비  푼과   되는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만이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무대에서 혼을 불태운 대가의 전부였다. 그러니  친구들의 열정은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철저히 손익을 따지는 어른이  현재에서 보자면 마음이 저릴 뿐이다. 성장이 끝난 여자 고등학생에게는 어쩌면, 정말 어쩌면   숟가락보다 비집고 나올 살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등학생들의 문화는  중학생의, 초등학교 고학년· 저학년 학생들의 문화가 된다. 성장기 학생들의 건강과 건전한 의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손쉽게 다양한 미디어와 메시지를 접할  있는 지금의 세태에는  기현상이  깊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외모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나 쉽게 한다. 살이 쪘네, 빠졌네 하는 말들은 인사말이 됐다. 하지만 그토록 외모 이야기를 하고 들으면서도 면역되지 않는 이유는 사회가 외모를 대하는 모습은 그만큼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외모는  자기 관리의  결과며 성격마저 짐작할  있는 창구인 마냥 됐다. 어떤 외모를 가졌든, 누구나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확신할  있다. 당장  역시 오로지 외모만으로 평가당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 아르바이트 구인 앱의 이력서에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첨부한 적이 있다. 며칠  상호를 검색해도 정보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피부 관리샵에서 연락이 왔다. ‘시급 2 . 초보 가능/외모 .’ 문자 내용이 황당했다. 저딴 거에 속을 만큼 돈이 급하지 않아 무시하고 넘겼지만, 이후에도 여러  같은 내용의 연락이 왔다. 십수 번을 면접도  보고 이곳저곳에서 떨어졌을 무렵,  레스토랑에서 먼저 전화가 왔다. ‘착해 보여서뽑고 싶다고 하셨다. 면접을  때도  목소리와 외모가  레스토랑과 어울리는  같다며 흡족해하셨다. 이상한 곳도 아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좋아 6개월 넘게 일했지만, 아직도 그때  말들이 신경 쓰인다. 사실 내가 일했던 곳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비스업종에서 외모와 서비스를 연결 짓는다. 외모가 훌륭한 사람이 서빙을 하면 음식이  맛있어지는 걸까? 전혀 관련 없는  가지가 병존할  있는 건덕지는 어디에 있을까?  의문에 대답할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지도 의문스럽다.

  뭣보다 황당한 건 서비스업만이 ‘용모 단정’을 찾는 게 또 아니란 거다. 여성 간호사의 머리망과 승무원의 구두처럼 의료인력, 안전요원에게도 단정해야 할 프레임이 씌워진다. 책에서 승무원의 인터뷰와 사례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 생략하고, 간호사의 이야기만 해볼까 한다. 사실 간호사의 머리망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푸른색의 간호복을 입고,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꼼꼼하게 싸맨 머리망에 하얀 간호화, 화장기와 생글한 웃음이 묻은 여성이 그저 내 스테레오 타입의 간호사였다. 어느 날 친구가 간호사의 머리망이 정말 쓸모없는 거라고 이야기해주기 전까지 말이다. 친구의 뜬금없는 일장연설에 ‘오염 가능성과 감염 예방’을 들먹이며 앵무새처럼 반박해댔지만, 아무래도 논리가 빈약한 주장이었다. 의사, 약사, 방사선사 등 다른 의료인에겐 이런 규정이 없지 않은가. 오직 간호사에게만 이런 두발 규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다른 의료인에 비해 여성이 확연히 많은 간호사의 성비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면 비약일까? 단정한 이미지, 그래 좋다고 친다더라도 여기에 따르는 다른 문제는 그저 낙관적인 사고로 넘어갈 만하지 않다. 간호사의 업무가 서비스와 단정하고 친절한 이미지에만 점철돼 그 전문성이 가려지고, 곧 직업에 대한 왜곡과 비하로 이어지는 상황은 이미 일어났다. 최근에 한 드라마에서도 간호사의 전문성을 얕잡아 보는 구시대적인 배역 설명글로 화제가 됐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성+간 등의 호칭을 가져다 썼고 수간호사라는 높은 직급의 전문가를 ‘수다를 좋아하는 아줌마’ 정도로 묘사했다. 곧 시정됐지만, 오랜 세월 간호사의 이미지가 어땠는지 확인 가능한 부분이었다. 간호계의 노력으로 이런 인식과 관행은 점차 개선되고 있으나, 과거를 묻기엔, 너무 깊고 오래된 악행이었다. 이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이렇게까지 물음표를 많이 쓴 글은 처음인 것 같다. 우리가 이상적인 외모를 좇는 데 논리가 있었다면 의문의 여지가 없었을 거니 뭐 당연하지만, 꼭꼭 곱씹어보니 씁쓸해지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러니 그 굴레의 시작과 끝을 찾기보다는, 이겨내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게 조금은 더 현실적인 방법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마무리가 정말 좋았다. 상한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사소하지만 확실한 방법들은 두고두고 머리에 담아놓을 만한 좋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당장 나부터 변하려고 한다. 평소보다 예쁜 친구에게 예쁘다는 칭찬 대신, 구체적이고, 보다 사랑이 담긴 칭찬을 하면서 말이다. 종국에는 건강한 사회가 되리라 과하게 긍정적인 결론을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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