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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 Feb 28. 2021

소비주의는 왜 과식을 부를까?

과식의 심리학

이른바 음식중독의 시대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음식을 '소비'한다. 방송국에서 식을 주제로 여러 방성이 만들어지고, 유튜브에서 먹방은 이미 유행을 넘어 필수로 자리 잡았다. 시중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메뉴들이 줄기차게 등장한다. 음식은 유행을 만들어 내고 너나 나나 할 거 없이 이 유행에 올라타 과시한다. 이로 인해 즐겁기도 하지만 수많은 문제들도 파생된다. 단순히 '과식' 혹은 '폭식'을 한다는 게 개인의 문제이며 개인의 의지로 해결해야 할 문제일까? 오롯이 '개인의 잘못'인 걸까?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앨리슨이다. 부유한 부모님 아래에서 키 크고 잘생기고 돈 많은 남편을 만나라는 소리를 수 없이 들으며 자랐다. 그녀에게 인생 최고의 과제는 이런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는 것이고, 당연한 메시지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결혼이 인생의 실패라 여기며 소위 자신을 "뚱뚱하고 외로운 노처녀"라 치부한다. 연봉이 10만 달러나 되는 변호사임에도 자신이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한다. 앨린슨은 스스로 자신이 뚱뚱해서 승진이 되지 않는다 생각한다.


앨린슨은 건강한 몸매를 되찾으려 무척 노력하지만 주류 미디어에선 늘 상반된 이야기들이 나오며, 그저 "덜 먹어라"라는 고전적 이야긴 화려한 광고와 겉을 번지르르하게 포장한 상품들만큼 앨린슨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 앨린슨은 소비에 푹 빠져 있다.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다이어트에 효과 있다는' 수많은 제품부터 산다. 좋다는 음식, 대체 식품, 믹서기, 운동복, 운동화, 헬스장, 운동기구, pt 등 일단 '소비'를 하고 벌써부터 날씬해진 거 같은 '기대'로 행복해한다. 소비로서 욕구를 충족시킨다. 소비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곤 잘 지내다 어느 날 어떤 요인으로 미끄러지는 시기가 오면 패스트푸드점에서 정크푸드를 실컷 먹는다. 그리곤 다음날 속죄의 마음으로 얼마 전에 산 믹서기로 신선한 주수를 짜 마신다. 자신의 행동을 무효화한 것이다. 하지만 과식은 무효화할 수도, 고칠 수도 없다.


앨린슨이 그 많은 돈을 소비하며 샀던 건강식품들과 운동 전문가며 영양사, 심리상담사, 트레이너에게 들었던 온갖 다이어트 방법은 앨린슨의 체중을 감소해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되려 건강에 이르는 길은 비밀스럽고 복잡하므로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한다는 불가사의한 생각마저 가지고 만다.


"비밀이 있다는 믿음 덕에 식품산업과 건강보조식품산업, 건강 상담가, 기업화된 피트니스 클럽이 유지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영양 상담과 심리 상담 송사자 수가 무척 많아졌다. 그중에는 절박한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미봉책을 파는, 자격과 훈련이 부족한 상담사도 있다. 이들 역시 내가 이 책에서 다루려는 소비주의 톱니바퀴의 또 다른 톱니다."

-p31


그렇다. 앨린슨의 문제가 어느 정도는 소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앨린슨이 자신이 번번이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는 더 나은 식습관을 단순히 절제와 의지력 문제로 돌리는 사회의 메시지들 때문이다. 음식과 과식에 대한 연구는 의료영역(영양학, 내분비학, 운동생리학), 정책 영역(식품과학, 규제, 식품산업에 관련된 정책), 개인 심리학(주로 선택과 활동에 대한 인지, 행동, 진화 이론을 토대로 ) 속한다. 이와 함께 '소비' 함께 한다.




과식의 씨앗, 소비문화의 등장


소비주의 삶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으로 가득 찬 삶일 것이다. 사치는 곧 자신의 계급이 되고, 우월성과 동질감을 선사한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나 문화에도 심리가 있다. 시민들을 문화에 통화시켜 경제와 사회정책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집단 심리는 개인을 소비하게 한다.


1. 도덕 원칙으로서 소비주의: 선진국에서 소비자의 상품 선택과 구매는 개인이 자유와 행복 그리고 힘을 얻는 수단으로 인식된다.


2.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소비주의: 국민을 지나치게 보호하려는 성향의 보모 국가와 반대로 현대 국가의 팽배한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는 소비자가 화려하고 멋진 상품을 선태하고 구매할 자유를 찬양한다.


3. 경제 이데올로기로서 소비주의: 공산주의의 엄격한 금욕주의와 반대로 소비주의가 자유무역의 동인으로 찬양되며 새로운 소비자를 키우는 일이 경제 발전의 열쇠로 여겨진다.


4. 사회 이데올로기로서 소비주의: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을 만들기 때문에 물질적 상품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사회 지위와 위신에 영향을 미친다.


5. 사회 운동으로서 소비주의: 소비자의 권리를 증진하고 보호하기 위해 종종 규제를 통해 가치와 품질을 보호하는 운동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다. 과거 소비보다 일이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 요소와 다르게 현재는 정체성을 곧 소비로 나타낸다. 여가시간에 돈을 쓰고 물건을 소유하는 일이 '행복의 주요 수단'이라는 '믿음'이 팽배해졌다. 채울 수 없는 소비 욕망이 더 많은 시장을 창조할수록 더 많은 상품이 생산되어 과잉 소비와 과잉 생산이라는 쳇바퀴가 돌기 시작한다. 값싼 '패스트' 상품(의복, 음식, 가구 등등 주로 의식주에 관련된)들이 유행하며 짧은 기간 사용하고 버리기가 일쑤다. 소비가 한 나라의 경제를 자극한단 이유로 소비라는 자유나 방종에서 나온 개인적 행동을 애국주의적 행동으로 탈바꿈시킨다. 자본주의가 우월한 체계이며 불평등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은 권력과 부, 지적 자본을 가진 자들의 문화적 우월주의와 도구주의를 들어낸다. 이런 정치, 문화, 사회, 경제와 묶여있는 소비는 곧 계급이 되고 문화를 조장한다. 나아가 자아를 찾는 수단이자 개인의 행복이란 생각을 팽배하게 하였다. 소비랑 과식이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소비가 늘어나면서 일인당 하루 칼로리 섭취량도 수십 년간 계속 증가했다. 이젠 정상체중의 사람들도 섭취량이 많아졌고 더 자주 먹는다.



식품산업의 마케팅과 소비주의


식품산업은 공격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면서 과식과 건강 문제를 어디에서나 낳고 있다. 늘어나는 음식의 양만큼, 장보기는 허드렛일이 아닌 쇼핑으로 변했다. 소득 자본의 증가는 더 잦은 외식과도 연결됐다. 알다시피 밖의 음식들은 사람을 자극하는 '맛의 조합'을 잘 알고 있다. 보존제나 지방, 소금, 설탕이 가득 들어간다. 이런 음식에 마케팅까지 함께하여 이쁘게 포장을 하고 고급스러운 이름을 지어준다. 유명 브랜드의 의류, 자동차, 가전제품처럼 특정 음식들도 유행을 한다. 문제는 식품산업이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려면 '자연적인' 음식의 상태면 안된단 거다. 그런 음식들은 더 먹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지 않는다. 식품회사는 초가공식품들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 날이 갈수록 기막힌 조합으로 소비자의 입맛을 중독시킬 방법을 고안해 낸다.



식품산업은 투자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먹어야 한다고 대중을 끊임없이 설득한다. 실험 심리 학자들을 끌어들여 교화적인 브랜딩 전략을 세운다. 쾌락적 기호성을 조합하고, 다양성을 제공해 선택의 여지를 준다. 편리함을 강점으로 내세우며, 건강 후과 효과를 강조하며 '저지방', '에너지 바' 같은 단어를 단다. 여성이나 어머니, 아이, 운동선수처럼 특별 집단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개인화시킨다. 심지어 영양정보를 모호하게 흘린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지천이 유혹의 덩어리들이자 당연히 티비나 기사에서 떠들어대는 정보들이 건강한 줄 아는 흘리기 속 세상이다. 식품에서까지 소비화는 나타난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와 유진 로츠버그 할튼은 소비사회의 사물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주장한다.


1) 차별화 : 사물을 소유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분해주며 남과 다른 개성을 강조해 준다.

2) 유사성: 사물을 소유한 사람이 사회적 상황에 통합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기능이다.


사람들은 상품과 브랜드로 자신의 개성과 고유함을 표현한다. 우리는 먹는 음식으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채식주의, 글루텐프리 식품마저도 자신을 표현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알레르기와 불내증 등 이런 '특별'식단은 유행이 되었다. 특별함을 추구하면서 그 계급에 속한 소속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 그 친구가 나보다 예쁘고 똑똑해서 상대적 박탈감에 힘들지만 같이 다니면 내가 그런 계급이 된 거 같은 동질감 때문에 친구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처럼.




식이장애와 제약산업


대부분 과식이 인지, 행동, 심리에 미치는 부정적 결과를 자주 경험하면서도 과식을 멈추지 못한다. 과식이 어떻게 본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과식 혹은 폭식 때문에 생긴 고통을 달래기 위해 다시 문제가 되는 음식에 의존해 버린다. '물질 의존'이 음식으로 발현된 것이다. 식품산업의 음식은 중독을 만들기 쉽다. 설탕+소금+지방의 조합은 몸속에 들어와 포도당 수치를 높이고 넘쳐나는 당을 처리하지 못해 지방으로 저장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췌장은 인슐린을 만들기 위해 과하게 일을 해야 하고, 그렐린과 랩틴 같은 식욕조절 호르몬들에게도 배가 부른 지, 고픈지 판단하지 못해 신호를 뇌로 보내지 못하게 방해한다. 뇌의 보상체계는 저런 설탕, 소금, 지방 조합의 초기 호성 음식의 자극성을 쾌락으로 받아들여 원하게 된다. 식이장애의 늪에 빠지게 된다.


문제는 이런 식이장애를 진단하는 기준의 문턱이 낮다. 몇 가지 체크 상항만 나열하고 몇 가지에 속하면 식이장애라 말해버린다. 사실 일주일에 한 번 빵집에서 커다란 빵을 사다 두세 개 정도 폭식하고 다시 음식을 어렵지 않게 조절하여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이것을 폭식증이라 부를 수 있을까? 건강한 식습관은 아니더라도 이게 과연 정신이상에 속하는 걸까? 낮은 문턱의 기준으로 환자로 분류하여 약을 처방한다. 치료를 부추긴다. 투약과 소비는 증가한다. 어쩌다 한 두 번 폭식하는 것만으로도 제약회사들의 마케팅에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치료를 권장하면서도 날씬한 몸을 위한 사회적 욕망을 부추기며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약을 판다. 장수와 젊음, 활기를 약속하며 건강보조식품을 판다. 이런 문턱 낮은 진단이 추가되면 될수록 수백만 명이 처방의약품의 잠재적 사용자가 된다. 질병마저 소비가 된다.




이렇듯 소비자 문화에서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식품산업과 제약산업은 소비자의 욕망을 끌어내기 위해 비슷한 작전을 사용하며 똑같은 수법도 수없이 동원한다. 큰 맥락에서 소비주의는 과식, 폭식의 문제까지 떠안으며 소비로서 텅 빈 '자아'를 채우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계급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데 음식을 이용하게 한다. 누가 뭐래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도덕, 정치, 경제, 사회, 사회운동이 만들어진 자신이 속한 곳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트리거가 된다. 현대 사회는 '소비'에 푹 빠져있다.


쓰고 먹고 마시는 소비에 푹 빠지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할 수 없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지 못한 실패를 자아의 실패로 경험하기 때문에 뒤이은 절망과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형태의 소비에 또다시 의존한다. 쳇바퀴의 반복일 뿐이다.


살아있는 유기체를 소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전체가 돌아감은 지당 하나 과연 이런 무분별한 소비가 옳은가? 이런 소비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냐에 대해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앞서 말한 위의 다섯 가지 유형 사이에서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현명하게 소비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 뭐든 한 번에 변하는 것은 없고 '의지'로 모든 걸 이겨낼 순 없다. 지속적으로 행동을 바꾸기 원한다면 천천히, 신중하게 문제를 되짚어 제거해 나가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한 번에 하나씩 습관이 되게 집중한다음,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맛과 다양성, 편리함을 중심으로 행동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그리고 소비주의를 넓은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말한다.


사치품이 아니라 경험으로 풍성한 삶, 쇼핑 대신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자연과 문화를 경험하는 삶, 사랑하는 사람의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차린 소박한 식사를 더 맛있게 더 맛있게 먹는 삶을 상상하여야 한다.


소비주의에서의 자기 방어


결국 소비를 조절하기 위해선 개인의 의지만으론 어렵다.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규제 능력이 커져야 할 것이다. 사람들을 가난하게, 그리고 뚱뚱하게 만드는 제도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의식을 깨워 이재 꺼 우리가 만들어 온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소비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의식 또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임상심리학자에겐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환자가 자신의 과체중을 받아들이고 자기 몸을 긍정하도록, 이른바 '뚱뚱할 권리'를 위해 도와 주느냐, 자신의 몸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식습관과 운동 습관을 고치도록 도와주느냐라는 선택지가 있다. 전자로 인해 긍정적(자신을 대하는) 결과가 생긴다 하더라도 비만은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며 과식은 컨디션 문제부터 이로 인해 파생될 연쇄 효과까지 삶의 질을 떨어뜨림엔 분명하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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