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비밀
'통증은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반응이다'
-8p
통증의 정의를 네이버 사전에서 빌려오자면 명사로서 ‘아픈 증세‘라고 나온다.
굉장히 추상적인 이 통증이란 단어는 아픈 증세라는 말 그대로 정말로 추상적이다.
물리적인 외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통증 또한 통증이며, 어딘가 모르게 내 몸의 모든 구조물들이 불편한 것 또한 통증이며, 누군가를 잃거나 슬픈 영화나 어떠한 상황을 맞닥 뜨렸을 때 느껴지는 마음의 아픔 또한 통증이다.
고통은 삶의 질이다. 단언컨대 누가 뭐래도 그렇다고 나는 주장한다.
물리적이든 감정적이든 통증은 내 삶의 전반적인 질을 떨어뜨린다.
아마 아파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며, 그 기간이 길수록 크게 공감할 거다.
3년 전쯤, 앉아 있던 시간이 늘어나 그런지 갑작스레 허리가 좋지 않더니 결국 디스크가 삐져나온 적이 있었다. 단 한순간에 요추 4,5번에서 삐져나온 디스크는 궁둥 신경을 압박하여 소위 말하는 까치발을 들어주는 종아리 근육을 마비시켜 스스로 들어 올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보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직접 그 ‘마비’라는 것을 경험하자, 나 스스로 내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정말 말도 안 되는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대로 안 돌아오면 어쩌지?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내가 뭘 잘 못했지?
순간 온갖 생각이 스쳐갔고, 다행히 초기 약물 치료로 삐져나온 디시크는 제자리를 찾았지만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 동작에 대한 ‘통증 지도’를 만들었고,
특히 통증이 제일 심하게 느껴지는 구부리는 동작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렇게 반 년정도를 매일이 짜증스러웠다. 아침에 눈을 떠 옆으로 구르는 동작조차도 조심하게 되고 마음 편히 할 수 없었다. 이미 만들어진 두려움은 허리를 구부리는 동작은 되도록 피하기 마련이었고 근골격이 그렇듯, 움직임을 하지 않으니 그 상태로 관절과 근육 움직임은 굳어가 제 기능을 못하니 더더욱 ‘잘’ 움직일 수 없게 되고 회복은커녕 악순환을 만들었다.
그렇다. 아무것도 안 하고 피하기만 해서 아무런 호전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통증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고, 그 오해로 수많은 사람의 삶이 망가지고 있다.'
-p8
통증의 메커니즘
'통증은 몸에 상처가 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현상이 아니라 몸을 보호하라는 신체의 반응이다. 불쾌한 감정을 일으켜 몸을 보호하게 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그 통증을 통해 위험이 될 만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신체를 보호할 방법을 찾게 되며, 특정 행동이나 행위를 피하게 된다.
통증은 손상의 척도가 아니다. 통증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지만 ’ 가짜‘가 아닌 이유를 이해하고, 플레세보 효과와 환상통에 이르는 통증의 까다로운 성질을 이해할 수 있으며,
왜 많은 사람들이 손상된 신체 부위가 완전히 치유된 후에도 통증을 계속 느끼는지,
왜 모든 통증이 진짜인지, 몸에 상처가 없어도 왜 통증이 있을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오랫동안 통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왜 그런 통증을 느끼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회복에 대한 현실적인 희망을 줄 수 있다.'
-p11~12
통증의 강도는 모두가 같지 않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를 마드는 요소는 여러 가지다.
특히나 직접적 외상이 아닌, 만성통증이라 불리는 지긋지긋한 어깨나 무릎 허리 같은 근골격 질환들은 실제로 x-ray나 ct상으로 아무런 소견도 보이지 않는데 움직일 때마다 통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건 구조적보단 기증적 문제로 일어나는 통증이며 ‘비 특이성 요통’이라 불린다.
그리고 여기엔 ‘심리’가 숨어있다.
통증이 무조건적 조직 손상의 척도는 아니란 거다.
실제로 조직에 통증이 느껴지고 뇌가 이것을 감지하는 메커니즘은 다소 복잡하다.
물리적, 열, 화학전 신호로부터 통증을 감지하여 감각뉴런의 통각수용기를 활성하하고 뇌의 지각 부위로 통증을 전달하면 우리는 통증이란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통증을 통해 몸을 보호하란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이 통증 전달 경로는 하나가 아니다. 굉장히 복잡하게 여러 뉴런의 시냅스 연결로도 이루어지고, 많은 신경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아 최종 뇌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때 직접적인 사고나 판단등 fact를 담당하는 ‘대 뇌’로 전달되기도 하지만, 뇌의 심부의 limbic system이라 불리는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번역계(둘레계)를 거쳐 통증은 전달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통증은 감정과 기억과도 밀접한 연관이 생기고, 그 기억들로 떠올려 감정을 꺼내므로 그때 느꼈던 통증이 재생되기도 한다. 또한 이 통증을 주고받는 시냅스의 전달 신호를 조절함으로 통증 또한 어느 정도 조절되기도 한다.
이게 통증을 느끼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고, 또 상황마다 다르며 통증에 감정과 기억이 관련된 이유이다.
통증은 뇌가 감지한다기보단 뇌의 복잡한 메커니즘에 의해 뇌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뇌가 통증이라 느끼는 지각이다.
통증을 느끼므로 우리는 우리 몸을 보호하려 한다. 조직이 한 번 손상된 이후 구조적 회복이 이루어졌더라도, 그때의 기억에 또 이 동작을 반복하면 다칠 거라 판단하는 뇌는 그 동작을 할 시 통증을 만들어 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만성적 통증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의 의식의 밖에서 이루어지며, 현 상황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여 몸의 손상을 보호하기 위한 뇌의 무의식적인 판단이다. 그러므로 통증이 있어야만 우리는 우리 몸을 보호할 수 있다. 통증 없는 삶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또한 그러므로 통증을 바라보는 뇌의 지각을 바꿈으로 통증을 줄일 수 있다.
이것이 가짜 위약을 투약해도 실제로 치료 효과가 나오는 플라세보 효과가 유효한 이유이다.
통증을 바라보는 인식(감각적, 감정적 경험)에 대한 주체성 또한 통증의 정도를 결정한다.
‘통증이라는 경험은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우리의 믿음과 기대로 조작할 수 있다. 우리의 뇌가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뇌의 힘을 잘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p.106
고통과 쾌락의 양면성, 그리고 공감
고통도 즐거울 수 있다. 같은 감각이 상황에 따라 고통스럽게도, 즐겁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뇌의 보상 회로와 관련이 있다.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선택하도록 설계되어 왔다.
하지만 인간은 스트레스가 받을 때 눈물이 쏙 날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음으로 스트레스를 쾌락으로 해소하고, 울트라 마라톤을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완주의 쾌락을 맛본다.
내가 배가 너무 고플 때 빵 한 조각은 더 없는 행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숨 쉬기도 힘들 만큼 배가 차 있으며 아무리 맛있더라도 그 빵은 거들떠보기도 싫어진다.
‘쾌감은 어떤 자극이 그 사람에게 보상과 도움이 된다는 신호이며 고통은 위험하거나 벌이 된다는 신호이다. 미래의 보상이나 위협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p.146
뇌의 고통과 쾌락을 감지하는 부위(보상체계 부위)는 겹치는 부분이 많다.
고통과 쾌락은 상호 연관성을 가진다. 고통 속에서도 어떠한 기대가 있다며 오이피드, 도파민 같은 신경 전달물질이 방출되어 고통을 쾌락의 기대로 전환시킨다.
앞서 말했단 감정적 뇌를 담당하는 부위(둘레계) 쪽에 이런 쾌락 호르몬을 방출하는 구조물들이 존재한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존재가 아닌, 보상을 추구하고 벌을 피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고통이나 쾌락을 경험할 때 물리적 감각 입력, 몸의 내부 균형, 잠재적 보상, 위협에 대한 인식이 결합하여 통증에 대한 ‘주관적 효용’, 통증의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고통과 쾌락은 유연하며 쓰이는 상황이 다르다. 뇌가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하는 능력으로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런 통증의 성질로 의해 우리는 타인의 아픔 또한 공감할 수 있다.
특히 내집단의 고통을 볼 때 전측 대상피질이 더 활성화된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능력은 본인과 타인과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 같다. 타인의 불행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그 불행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정도는 다른 이야기이다. 타인의 아픔에 너무 매몰되어 버리면 그 자체로 본인 우월감에 젖어들게도 된다.
연민 또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정신적 피로를 동반한다. 모두의 고통에 본능적으로 깊이 반응을 하게 되면 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하게 되고, 결국 고통받는 타인을 실질적으로 돕는 데 사용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인지적 영역의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을 연민하고 있다는 그 자체의 도덕적 우월성에 매료되어 그 자체에 매몰될 가능성 또한 배재할 수 없다. 고통받는 타인과 나를 너무 묶은 나머지 실질적으로 도움은 아무것도 베풀 수 없게 된다면 타인과 사회, 본인의 이익이 만들어 질까?
통증은 전염성이 강하다. 이것을 이해함으로 우리는 공감을 실질적 도움으로 전환하는 방법 또한 배워야 한다.
이렇듯 통증은 더 이상 ‘구조적’ 문제만으로 치부할 수 없다. 조직이 수복되고 회복되며 통증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복잡한 통증 회로는 우리의 감정과 기억 또한 같이 건드린다.
과거의 경험, 그때의 상황, 통제감의 상실, 만들어진 예측시스템 등에 의하여 통증의 정도를 개개인은 다 다르게 해석하며, 평생 가져갈 수도, 떨쳐 낼 수도 있다. 통증의 감정적, 사회적 요인이 사실은 만성 통증, 중독, 자해 같은 질환을 이해하며 치료해 줄 수 있는 키가 되어 줄 수 있다.
뇌가 안전할 수 있는 증거를 늘리거나 스트레스 요인을 낮추어 기울기가 평행을 이룰수록 뇌의 통증 체계가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앞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아침에 눈 뜨며 침대에서 일어나기 조차 버거웠던 나는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 생겨난 디스크라면, 되려 숙이는 동작을 늘려보기로 했다. 의도적으로 머리를 감을 때 허리를 숙였고 일정 시간 움직이며 기피하던 여러 동작들을 하는 시간을 늘렸다.
내 디스크는 그 후로 사라졌다.
움직이면 아플 거라는 뇌의 그 예측(예측 시스템)을 움직임으로 움직여도 된다는 예측으로 바꾼 것이다. 난 나의 뇌의 통증 지도를 지운 것이다. 숙이는 동작은 위험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란 걸 다시 학습시킨 것이다.
이전의 경험으로 이 동작시 아플 거라는 ‘예측’을 만든 뇌는, 이 동작을 피했고,
의식적으로 금기된 동작을 하면서 뇌에서 발생한 예측을 깬 것이다. 오류를 만들어 우리 몸과 외부 세계에 대한 내부 모델을 서서히 바꿔 몸을 움직이는 것이 통증을 크게 일으키지 않고 위험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하여 통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움직임을 회피하는 경향은 통증이 아니라 통증에 대한 예측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만성 통증을 치유한다는 말은 위협과 위험을 예측하는 관점에서 보호와 안전을 예측하는 관점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p.140
통증은 복잡하다. 그리고 심리, 기억, 사회, 감정, 연민, 기대, 쾌락 등 많은 부분과 함께 한다.
이런 통증의 본질을 알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좀 더 건강하고 유연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사회 전반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겠지. 우리 모든 좀 더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 좀 더 좋은 삶을 영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