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빠와 천자문
우리 아이들은 영어보다 한자에 강하다. 그것도 미국에서 말이다. 우리 아이 또래 정도의 6세 어린이가 미국에 오면 일반적으로 빠르면 3~4개월, 보통은 6개월 정도면 영어가 된다고 한다. 작년 10월, 아이들이 미국 학교에 처음 갔을 때, 학교 선생님도 같은 얘기를 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영어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쌍둥이라서 서로 도와주면서 잘 적응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상황으로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우리 아이들은 서로 도우면서 잘 적응했지만, 영어 스트레스도 크게 받지 않은 것 같았다. 학교 생활에 대해 물어보면 햄버거와 치킨, 피자로 점심을 줘서 즐거워했고, 낮잠시간이 있어서 좋았으며, 둘이서 재미있게 논다고 했다. 영어는 하냐고 물어보면 영어는 안 하고, 한국말만 하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한국말로 가라고 하면, 같은 반 친구들이 go로 알아들어서 간다고도 했다.
지난 2월에, 아이들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그때 선생님 왈, 쌍둥이들은 학교생활을 잘하는데, 영어는 하나도 늘지 않고 처음과 똑같다고 했다. 이유는 둘이 너무 친해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They have a strong bond with each other.) 심지어 낮잠을 잘 때도 한 명이 다른 쌍둥이의 배나 다리 위에 머리를 두고 잔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 학기에는 쌍둥이를 각기 다른 반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코로나로 학교도 못 가고 다시 24시간 모국어 체제가 되니, 영어는 더더욱 기억의 언덕 너머로 사라져 갔다. 대신 우리말은 날로 유창해져서 어휘와 표현이 확장되었고, 한글을 깨쳐 책을 스스로 읽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영어 스트레스를 안 받을 리가 없었다. 새로운 환경과 언어 속에서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이다. 쌍둥이들은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둘이 똘똘 뭉치는 방법을 택했던 것 같다. 외부의 적이 생기면 내부는 단단히 결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태생이 한 몸이었던 쌍둥이다 보니 낯선 미국 학교에서 아이들은 선생님 말씀처럼 강력한 본드가 되어서 버텼던 거다. 어찌 보면 나의 책임이 크다. 나는 영어는 그냥 되겠거니 그랬다. 오히려 어렸을 때 미국에 오면 금방 한국말을 잊어버린다고 하니, 한글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가르쳤고, 천자문을 가르쳤다. 우리가 미국에 이민 온 것도 아니고 나의 휴직이 끝나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인데 말이다. 기우였고 아빠의 오버였다.
아이들은 코로나 휴교령으로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자 월, 수, 목, 이렇게 일주일 3번, 1시간씩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됐다. ZOOM 수업인데, 선생님이 질문하면 다른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대답을 한다. 미국 애들은 그렇다 쳐도, 심지어 우리 아이들보다 늦게 미국에 온 중국 애 조차 영어로 곧잘 대답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완전 꿀 먹은 벙어리다. 한 마디도 못 알아듣고, 내가 옆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통역을 하고 있으니 온라인 수업은 내 영어 수업이 되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이런 방식의 온라인 수업이 의미가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원어민도 아닌 내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이상하고, 코로나로 튜터링 하기도 어렵다. 이럴 땐 과감해져야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자. 약점을 보완하는 것보다 강점에 집중하자. 쌍둥이들은 영어보다 한글을 좋아하고, 한자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하기 싫은 영어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자. 이제 한글을 깨쳤으니 한자에 집중하자. 그렇게 나는 아이들과 천자문을 끝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상형문자로 출발한 표의문자다. 그래서 아이들은 천자문을 못 생긴 그림 혹은 낙서로 받아들였다. 한글이나 알파벳처럼 자음과 모음을 나누고 규칙을 따지지 않아도 되니 접근하기가 좋았다. 천자문을 공부하면서 아이들은 책에서 읽거나, 대화에서 쓰는 말에 대해 그것이 한자인지 우리말인지 질문했다. 단어의 의미를 자연스레 파악하고 용례를 익혀가며 어휘가 늘었다.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배운 한자를 적용해 의미를 유추했다. 또한 천자문은 아이들 한글 훈련에도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한글로 쓰여 있는 한자의 음과 뜻을 반복해서 읽고 해당 한자가 사용된 단어와 그 뜻풀이를 읽게 했더니, 미국 올 때 “가나다라마바사...”기본 한글도 제대로 못 읽던 아이들이 7개월이 지난 지금, 동화책을 스스로 읽는 수준이 됐다.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말을 잘해야 한다. 우리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우리말 어휘의 70% 이상인 한자를 알아야 한다. 한자를 모르면 우리말을 정확하게 사용할 수가 없다. 물론 학습에는 고비가 따른다. 하루 8자, 125단원으로 구성된 천자문 교재로 시작했지만, 에너지가 넘쳐 집중하기가 어려운 아이들을 가르치며 진도빼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과자와 만화로 달래가면서 끌고 왔다. 그렇게 시작한 천자문은 이제 107단원, 856자에 이르렀다. 7개월 걸렸다. 공부한 856자 중 거의 대부분을 까먹었지만 천자문 학습의 효용은 생각보다 컸다.
한자, 특히 천자문으로 시작하는 한자공부는 어린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천자문은 아이들에게 그림처럼 인식되기에 말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시작이 가능하다. 한글을 아직 몰라도 상관없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에 예전에 어릴 적에 할아버지께 천자문 배웠던 내용이 나오는데, 선생님의 어머님이 한글은 하루 이틀이면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렇게 금방은 아니더라도 천자문을 가르쳐 보니, 한글은 천자문을 통해 더 빨리 깨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에 있을 때 자주 갔던 목욕탕 이발소 할아버지 사장님은 아이들 머리를 깎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 한자를 가르치라고 했다. 한자를 알고 한문을 공부하면 문리가 트인다는 말씀을 하셨다. 문리까지는 잘 몰라도, 확실한 것은 한자를 공부하면 개념어를 쉽게 이해하게 되고 어휘와 표현이 풍부해지며 호기심을 가지고 단어와 명칭을 살피게 된다는 사실이다. 문득 학교 다닐 때 영어시간에 국어 공부하고 국어시간에 영어 공부하는 친구에게 꼴통이라 부르던 선생님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그렇게 하면 힘만 빼고 소득이 없으니 차라리 자거나 노는 게 낫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러고 있다. 어쩌면 선생님 말씀처럼 지금은 그냥 노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 천자문 읽는 소리가 세상 어느 소리보다 듣기 좋고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