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 챌린지로 본 우리의 사랑
“우리 딸 왔어? 학교 다녀오느라 고생했네”
친구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친구 집에 들어서는 순간, 친구의 어머님이 친구를 향해 건넨 인사말이 지금도 선명하다. 다정한 말투와 따뜻하고 포근한 눈빛과 표정. 크고 넓직한 품으로 포옹하는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연결감이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하고 어색했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느껴 본 적도 없는 따뜻함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그날의 길은 참 슬펐다. 부모님이 날 사랑한다고는 머리로는 믿고 있었지만,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느꼈던 순간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쉬지 않고 매달 꼬박 성실하게 돈을 벌어다 주셨다. 의식주 부분에서 문제없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느끼셨다고 한다. 엄마는 성실의 뒷바라지 끝판왕이셨다. 자식들이 외지에 가는 순간까지 늘 동행 하셨고, 문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적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마음으로 깊이 느껴본 적이 없을까. 이상하다. 분명 난 받은 것이 많은데. 배은망덕한 사람인가. 그러나 사랑하는 것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나에게 분명 다른 차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SNS에서 ‘만약에 자고 일어났는데 내가 바퀴벌레로 변해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질문으로 자신에 대한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는 ‘바퀴벌레 챌린지’가 한창 유행하던 때였다. 나 또한 시험 삼아 부모님께 보냈다. 도대체 어떻게 답해주실까. 아빠는 분명 이렇게 답하실 거고, 엄마는 분명 이렇게 답하실 거야. 라며 이미 예상되는 답을 내 안에 가득 안은 채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이잉...’ 답이왔다. 엄마다.
[일단 마음이 아파 울 듯. 먹을 거 주고 씻겨주고 매일 이야기도 나누고 집도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세상 구경도 시켜주고 나의 분신처럼 데리고 다녀야지]
‘응?’
‘지이잉...’ 또 답이 왔다. 아빠다.
[예쁜 상자 안에 이불도 만들어주고 목욕도 시키고 항상 곁에 데리고 같이 다녀야지]
‘에? 이게 무슨….’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당황스러움과 함께 그 순간 눈에서 눈물이 왈칵 났다. 카톡 몇 자에 부모님의 진심이 순식간에 내 마음 깊이 확 와 닿았다. ‘나를 사랑하고 있는 그 느낌’을 카톡 몇 자로 내가 이렇게 쉽게 받아버리다니. 이건 나의 예상 답안에도, ‘사랑받는 느낌’ 시나리오에도 없는 것들이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게 사랑하고 계셨구나.
자식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다. 내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어렸을 적 부모가 아이에게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에 따라, 성인이 된 아이는 부모로부터 습득된 방식을 그 자녀에게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 방식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받은 대로의 사랑이 그대로 나가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랑은 진실된 방식일거다.
누군가 말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사랑을 상대에게 준다”라고. 아빠가 경험한 사랑, 엄마가 경험한 사랑은 바로 부모님께서 나에게 주고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으리라. 바퀴벌레 사건은 그들의 진심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어쩌면 나는 ‘바퀴벌레 챌린지’의 가장 큰 수혜자일수도 있겠다. 상대의 사랑 방식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그 방식이 내 방식으로만 덮여서 보지 못했다. 나는 이미 사랑받고 있었다.
오늘, 사랑의 맛, 경험된 방식으로 우리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고, 이제 나는 사랑을 아는 것의 방식이 아닌 느끼는 것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