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을 길러주는 나의 선생님
오늘의 재료 : 식빵, 옥수수, 아보카도, 계란
토스터에 잘 구워진 식빵에 시큼하고 달콤한 머스타드 소스를 바르고 계란과 옥수수를 듬뿍 얹고 아보카도를 올려놓는다. 그 위에 올리브유를 넉넉히 두르고 후추를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갈아 넣는다.
식빵 위 올려져있는 아보카도와 고소한 계란의 조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잘 어울렸다. 그리고 탱글한 옥수수가 입안에서 터질 때마다 도파민도 같이 팡팡 터진다. 오늘의 레시피. 주말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이렇게 나를 위해 요리를 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대학원에서 매일 매일 자신감이 하락하고 있는 것을 느끼며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내담자의 어려움들을 그 당시 배우던 이론들과 연결 지으려 애쓰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초보 상담자가 알긴 뭘 알겠나. 잘한들 얼마나 잘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이 잘 되었을 때가 있었다. 상담이 잘 되었다고 느끼는 경우에는 대부분 마음이 접촉되었을 때였다. 마음이 접촉되었다는 말은, 정서나 감정적인 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의미로, 깊은 감정적 연결 또는 공감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이는 상담자로서 내담자를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보 상담자였던 나는 상담이 점차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내담자가 어렵게 느껴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는 상담 시간은 예측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래서 회기가 끝날 때쯤이면 뿌듯함보다는 찝찝함과 답답함이, 보람보다는 한숨만이 가득했다. 나는 상담가로서 자격이 있는가, 앞으로 상담가로서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받고자 온 이들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인가.
오만가지 생각이 내 자존감을 물고 뜯었다. 그 어디에서도 유능감과 성취감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너덜너덜 구멍이 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 해결되지 않은 복잡한 생각들이 마음의 허기로 찾아왔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빈 냉장고 속에 남아있는 것은 세일할 때 구매했던 양배추, 계란 그리고 몇 가지 소스들뿐이었다.
‘후, 어쨌든 이 재료를 소진하는 게 먼저겠군.’
나는 요알못이었기에 유튜브 레시피가 필요했다.
검색창에 ‘양배추 요리’를 치니까 각종 레시피가 많이 나온다. 그중 가장 간단하면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요리 레시피를 선택했다. 딱 3가지. 양배추, 계란 그리고 굴 소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배추를 볶는다. 양배추 색깔이 반투명 해질 때면 계란을 그사이에 풀어 넣는다. 반투명하나 섞인 양배추와 계란 사이에 굴 소스 한 큰술을 넣으면 된다. 고슬고슬한 쌀밥 위에 양념 된 양배추 계란을 위에 얹고 통깨를 살살 뿌려주면 ‘드디어 완성!’.
굴 소스에 절인 양배추와 계란의 고소한 냄새가 집안 가득 풍겼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요리였는데, 입속에 들어간 양배추 계란과 밥은 너무나도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짭조름한 맛에 뭔가 더 고소함을 추가하고 싶다. 엄마가 방앗간에서 직접 공수해 온 참기름이 생각난다. 쪼로록. 참기름을 추가하니 고소한 맛이 추가되어 배로 맛있다.
‘어…! 냉동고에 새우도 있는데, 나중에 새우도 함께 추가해 먹어봐야겠다. 엇? 생각해 보니 나는 매운 걸 좋아하는데, 나중에 청양고추도 추가해 먹어 봐야겠다. 짭조름함과 매운맛이 만나면 굉장히 환상적이겠는걸? 아니지, 나중에는 치즈도 올려 먹어봐야겠다. 아니, 불닭 소스를 조금 더 섞어 먹어볼까?’
내 머릿속에는 어느샌가 재료 배합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내 마음 또한 아까와는 다른 텐션이다. 죽어서 가만히 멈춰있던 심장이 새로운 심장을 이식받아 새로운 박동이 시작되듯이 쿵쿵 뛰고 있다. 생애 최초로 요리에 눈을 뜬 순간이다.
참기름, 새우, 청양고추, 치즈, 불닭 소스 등의 가능성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초보 상담자로서 실패경험으로 잃었던 생기를 금세 다시 차오르게 만들어 주었다. 내 현실의 삶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능성을 나는 요리에서 찾아냈다. 끝에는 늘 노력에 의한 결과물들이 있었다. 그 결과물들을 보면서 나는 나 스스로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격려했다.
오늘 요리의 맛은, 요리로부터 인정과 칭찬과 격려의 힘을 받아 더욱더 잃었던 주체성을 가질수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수천 가지 수만 가지의 레시피 실험을 진행했다. 혹여나 그 실험이 실패할지라도 괜찮았다. 왜냐면 다음번에는 이 조합은 제외하면 되니까. 실패 앞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요리를 하면서 나 스스로가 단단해져 갔다. 쌓인 경험들은 요리에 대한 ‘주체성’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는 일상에서도 좋은 영향이 되었다.
요리는 나에게 가능성이었고, 인정이었고, 스스로에 대한 격려였다. 나의 선생님은 ‘요리하는 나’였다. 요리와 나는 이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