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경의 희재를 듣고
우리 어머니는 내내 아프다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상태는 급속도로 안좋아졌고, 시한부 판정을 받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다. 내가 겨우 21살 때의 일이었다. 상경해 겨우 대학 생활에 익숙해져있었던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엄마를 간병하러 고향에 내려갈 것인가, 서울에 남을 것인가.
말은 가벼웠다. 친척들은 할 일도 없는데 엄마를 그렇게 떠나보낼 것이냐고 질책했다.
"너 나중에 후회한다. 땅을 치고 후회한다."
어머니를 잃어본 적도 없는 어른의, 저주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을 들어야했다. 어머니의 소식만으로 혼란스러웠는데, 혼란스러워 물렁해진 마음에 그 말은 쉽게 박혔다. 이미 휴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어머니의 '절대 휴학하지 말고 너는 서울에 있어라'는 말까지 더해져 나는 더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청개구리인 나는 이미 휴학을 신청했다. 다만, 간병을 할 수 있을 지를 고민했다. '그럼 남에 손에 맡길 거냐'는 친척의 말보다도, 내가 어머니를 편하게 간병해드릴 수 있을까, 전문가가 더 편하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런 내 고민을 알았는지 어머니를 이제껏 간병해온 큰언니는 내게 말했다.
"간병은 네 선택이야. 근데 휴학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마음이 그래야 편할거야."
진심은 늘 통하는 법이다. 큰언니의 말에 내 마음이 정리되었다. 나는 짧았던 서울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간병할 준비를 했다. 박스 3개로 상경한 나는, 1년만에 고향으로 향했다. 9개의 박스그리고 캐리어 한 개와 함께.
어머니를 간병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그것이 다 추억이 될 것이라는 어른의 말은 폭력적이었다. 물론 어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은 귀했지만, 나는 어머니를 그때 그 순간만으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가장 예쁠 때의 모습으로 당신을 기억해주길 바라셨다. 아팠던 순간, 내가 간병했던 순간은 다 잊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낑깡아, 엄마는 너 안미워해. 못미워해."
어머니는 끝까지 내가 당신을 미워하게 될까봐 무서웠던 것이다.
어머니를 잃기엔 너무 이른 나이, 아니, 누군가를 잃는데에 적합한 나이는 없다. 그러나 나보다 조금 더 살았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잃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듣는 말은 너무 폭력적이었다.
"그래도 간병하고 있었을 그때가 그리울 거야."
"애미 없는 자식은 티가 나니 티 안내고 살아라."
겪어본 적 없으면서 겪고 있는 나에게 하는 말이란. 약 한 달간을 씻지도 자지도 못하며 엄마를 간병한 나는 너무 피곤했고, 슬펐고, 지쳐있었으므로 그 말에 대꾸할 여력도 없어서 그냥 네, 하고 웃었다. 오직 큰언니만이 길길이 날뛰었다. 적어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안된다고. 언니는 그 정신 없는 와중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기꺼이 내주었다. 그런 언니가 너무 고마워서 나는 언니를 말리는 척만 했다. 언니, 장례식장에선 정숙해야지…. 소동은 아버지가 와서 끝이 났다. 큰 언니는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면 나와 운다. 울다가 웃는다.
엄마를 잃고 4년이 지나가고 있다. 아직도 나는 건강한 추모를 모르겠다. 아마 영영 모를 것 같다. 그래서 힘들 때면, 이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래, 잃었지만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나는 영영 엄마를 잊을 수 없다. 다만, 연습하는 것이다. 기억하는 연습. 건강하게 엄마를 추억하는 연습. 그리고 나는 내내 그 연습을 지속하겠지. 끝이란 없을 것이다. 정답이 없으니까. 다만, 최대한 건강한 방향으로 엄마를 기억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너무 슬퍼서, 울 수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내가 울면 그댈 보내준 것 같아서' 울지도 못하겠는 사람에게. 감히 먼저 잃어본 내가 말해주고 싶다. 잃었으나, 우리는 내내 잊을 수 없으니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고, 원망하고 싶을 때는 맘껏 세상을 원망하라고.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자신마저 잃지는 말라고. 당신의 감정이 당연한 것이라고. 과거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말을,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을 당신들께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