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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임 Jun 19. 2024

딛고 넘어서 가야 할 길

우리는 어디를 지향하는가



 언제부턴가 사회 기류가 이상하다. 살만큼 살아오다 보니 감이라는 것이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은, 어느 정도 누구나 인지하는 바이다. 사회를 떠벌이다 보면 정치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글을 쓰면서 나름의 생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정치나 경제, 사회 전반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것이다. 한번 틀어놓은 수도꼭지는 봇물을 이룰 것이고, 결국은 나조차도 혼돈의 시간을 보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갑자의 인생을 살아보니, 본 것과 느낀 것을 말 안 하는 것만큼 비겁한 일도 없다고 느낀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인 팬데믹은 세계사의 흐름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모두가 공멸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런 암묵적인 생각은 사람들을 좀 더 뻔뻔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러시아가 설마 했지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벌써 2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니 언제 끝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중국 또한 언제부터인지 비정상 국가로 인지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세계 패권국가인 미국도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로한 대통령과 트럼프가 다시 부상한다는 소식도 의외로 여겨진다. 모든 국가들이 극한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고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시작한 것 같다. 우리의 상황이 더 심각한데 말이다. 386세대인 나는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동류들 곁에서 청년의 시간을 보냈다. 비록 이른 나이에 군 생활을 한 탓에 그들과 합류하진 못했지만, 그들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굳건히 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작금의 상황은 그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전체를 생각하기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개인주의가 어느 때보다 강렬하다. 흩어진 개인은 정치적으로 다루기가 용이할 것이다. 그렇다고 뭉쳐야 한다는 진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동류들과 소통하고, 서로의 가슴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심지어 가정에서 자랄 때, 거의가 혼자였다. 인구정책의 혼동도 있었지만 소득대비 개인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성장기기를 거쳤기에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386들의 주류적인 생각 또한 변절했다는 느낌도 든다. 우리 세대 또한 장년이 되어 갈수록, 점차 개인적 파편화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고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를 탓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시대적인 조류가 그랬다고 자위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상을 들여다보는 혜안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가는 오르고, 생계는 그리 풍요롭지 않다. 빈부의 격차는 점점 벌어져 서로를 경원시할 정도로 사회단합은 꿈도 꿀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간다. 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혼란스러움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나름의 규준적인 프레임을 갖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답답한 심정을 가질 것이다. 그래도 시간은 꾸준히 흐르고 어떤 식으로든 결말은 날 것이다. 원인에 결말은 늘 순종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만의 TSMC가 최근 약진을 거듭하는 것 같다. 퀄컴, 엔비디아 등의 굴지의 글로벌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대만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중소기업 위주의 나라인 대만이 어느 사이 이렇게까지 성장하여, 우리의 반도체 분야를 위협할 정도까지 되었다고 생각하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들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상하, 좌우의 소통이 네트워크로 잘된다는 점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도 예전보다는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많이 강조하지만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체계에서 그들은 특별한 관계망을 형성한 듯하다. 특히 고객사와는 경쟁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기치가 사회적 문화가 될 만큼 서로 신뢰의 바탕이 잘 마련되어 있는 듯하다.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소통구조는 더 이상 신선한 아이디어 창출에 뒤질 수밖에 없다. 아직도 우리의 문화적 단면은 이런 일사불란함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획일적이고 경직된 조직에서는 아이디어는 사장되고 만다. 우리의 기업구조에는 윗선의 지시는 곧 시행방침이 되고는 한다. 관계되는 중소기업 또한 말로는 상생관계라지만, 조금이라도 이익에 부합되지 않으면 버려지기 일쑤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관계망 속에 최소한의 이익이 눈앞에 펼쳐지면 거침없는 배신이 난무한다.



 사농공상의 의식 또한 아직도 통념 속에 지워지지 않았다. 공대를 기피하고 의대로 줄을 서는 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의 입시철 행태는 앞으로의 국가경쟁력에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하무며 공공기관에서조차 행정직 우선의 의식이 아직은 팽배하다. 많은 부문에서 차별을 철폐했다고는 하지만, 기술직들은 관련 분야 외에는 좁은 시야를 갖는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인 프레임은 광범위하게 퍼져있어,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의식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일부에 불과하다. 인식의 틀은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생존의 문제에 있어서는 무슨 일이든 바꿔야 한다. 대전환의 시기는 이미 우리 발아래에서 목전으로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 분위기는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면서, 토머스 홉스의 문장인 리바이어던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보는 듯하다. 특히 본보기가 되어야 할 정치권부터 법대로 하자는 의식이 이마를 찌푸리게 한다. 행정은 거부권을 남발하고, 입법부는 대화와 타협이 사라졌다. 많은 정부가 지나갔지만 이런 식의 정치는 본 적이 없다. 무도한 군사정권하에서도 최소한의 대화를 통해서 국민의 눈을 피할 수 없기에 타협하고자 했다. 현 집권세력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는 듯싶다. 사람들이 기댈 마지막 보루인 '법적 양심'이 자신들의 전유물인 양 하는 일마다, 이런저런 하마평 한마디 없이 실질생활과 연루된 민생법안을 시혜적으로 던져주는 시늉만 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회의 역할은 여당과 야당의 견제와 협조를 중심으로 가장 좋은 타협을 이끌어 내는 데 있다. 그러한 국회의 역할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련의 주도권 싸움으로 보이는 정치면은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목불인견의 상태로 치달아 간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봐주려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은 감이 있다. 유권자인 국민도 피로감에 혼돈의 시간을 겪을 때가 있다. 바로 잡아 줄 분야는 명확히 언론뿐이다. 그러나 과연 이 나라에 제대로 된 언로가 있나 싶다. 대중매체인 신문과 방송 등은 글로벌 매체를 더 선호하는 언중과 혈투 중이다. 세대 간의 갈등 또한 극에 달하고 있다. 유난히 변화에 민감한 젊은 층들과 보수적인 가치를 선호하는 장. 노년층들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 위의 비장함을 연출하고 있다.


 이 나라는 지금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수직적이면서 종적 질서에 매달려, 상위 0.1% 성적을 받아 든 젊은 날의 부류들에게 모두의 삶이 통째로 얽매어 들어가고 있다.


모든 것은 결국 시간이 해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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