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에서 찰리 채플린은 특유의 걸음걸이로 공장으로 출근한다. 양 떼가 통로를 따라 시간이 되어 먹이를 먹으러 가듯이, 인간군상들도 먹이인 돈을 바라고 인도를 따라 공장 안으로 모여든다. 이러한 두 장면을 배치한 것은 공장기계화에 길들여지는 산업화의 단면과 뭇 군상들의 생활상을 교차시켜 보여주려 함이다. 어쨌든 그 군상들 중에 챨리도 섞여 있다. 볼트를 죄는 공정조에 속한 챨리는 우스꽝스러운 특유의 액션을 보여준다. 양손을 사용하여 스패너를 쥐고 연신 너트를 죄는 그의 손은 속도를 높이라는 경영주의 명령하달에 속도를 높인다. 잠시 교대한 그의 양손은 여전히 작업 시의 동작 잔상에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기계가 미처 할 수 없는 공정을 대신하는 기계인 것이다.
20세기 초의 자본주의 물결이 예고하는 인간의 모습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새로운 모던타임스의 세상이 열리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인간에 대한 옥죄기를 시작한 이후로 사람들은 자유와 접목된 교묘한 노동에 신음을 하면서도 오로지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양 떼로 전락하고 있다. 근원적 욕망덩어리인 인간은 오로지 자본가가 던져주는 먹이인 돈에만 관심이 있다. 영혼이라도 팔아 벌고 싶은 돈, 그 먹이사슬의현장은 여전히 위태로워 보인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 또한 빨라지고 있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들, 자본의 위력은 가속력을 더해 눈덩이처럼 부풀어지고 있다.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이래 이렇게 신계급주의 그림자가 드리운 적은 없었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는 허울뿐이고, 자본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세계로 나가는 현상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의술의 발달로 고령화 사회는 큰 부담감으로 이미 다가온 지 오래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미 눈치채고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자본유무의 계급화가 도래한 사회를 인지하고 결혼도, 출산도 모두 거부한 채 홀로 살기가 대세로 굳어지는 중이다.
딸아이는 늘 시간이 부족해 보인다. 회사에서 주 5일을 일하고 남은 휴일은 잠을 자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그러기에 필요한 물품은 늘 온라인 쇼핑으로 해결하곤 한다. 하긴 오프라인에서의 구매는 이미 고 연령층 만이 이용한다고 하질 않던가? 저녁에 구매한 물품은 새벽에 운동을 위해 나서다 보면 어느덧 현관 앞에 택배용 가방이나 묶음으로 와있다. 누군가 잠을 쫓아가며 수고로이 일한 덕분에 편하게 받을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이라 생각했다.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예상외로 오랜 기간 진행이 되자 비대면 구매가 성행을 하더니, 이제는 그 편리함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여전히 찾는 덕에 수많은 택배 업체들이 호황을 맞은 듯하다.
무엇이든 편리함을 발견한 인간은 단 한 번도 그 수단을 포기한 적이 없다. 나는 물품을 배송하는 택배가 대표적인 산업분야라고 생각한다. 일정 금액의 요금만 내면, 산간벽지 어느 곳이라도 물품이 전해진다. 심지어 부동산의 가치도 배송이 되냐, 안되냐로 가치를 재는 세상이다. 속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산업화 이후로 속도는 모든 효율의 척도가 되었지만, 유난히 우리 사회에서는 그 빠르기가 숨이 막힐 지경이 되고 있다. LTE보다 5G로 속도를 높여야 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의 머리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속도에 도취되어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다고 채플린은 말했었다. 스티브 잡스의 그 대단한 프레젠테이션 이후로 실제로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갇혀버렸다. 사람들 간의 대화도 음성을 통하는 것이 아닌 스마트폰을 통한 문자 주고, 받기로 대체되었다. 모든 일은 자동화 기기로 바뀌었고, 의사전달도 기기를 이용할 뿐이다. 하물며 구매대행이나 택배 등 못할 것이 없겠지만, 그러는 사이 인간이 사라지고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서로 의지하고 보듬는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근래의 출산율 저하와 인구 감소는 이러한 기기에 의지하는 홀로인 군상들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저층구조의 심리를 형성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방을 다녀보면 어울리지 않게 큰 창고형 건물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른바 글로벌 택배회사의 창고형 건물인 것이다. 수도권 외곽이나 지방 도시 근처엔 어김없이 이런 창고 건물을 볼 수 있다. 워낙에 택배가 성행을 하니 그러려니 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땀이 뒤엉킨 삶의 현장이었다. 근무시간이면 5만 보는 잽싸게 걸어야 일거리를 소화하던 어느 청년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 세상을 하직했다. 다른 사람하나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택배 가방을 분류하다 뒤로 넘어져 거품을 문다. 모두 작업현장의 CCTV에 찍힌 동영상 들이다.
이들은 모두 비정규직들이다. 시간제 일이나 일용직 등으로 가계에 도움이 될까 싶어 나온 가정주부 등도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시간제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자랑한다. 주간조, 오후조, 심야조로 나뉘고, 공휴일 인센티브로 시급의 1.5배를 가산도 해주니 선택형 일자리로 선호들 하는 모양새다. 자동화 시스템으로 무장한 기업들은 인건비 절감은 지상과제로 생각하는 것 같다. 정규직은 꿈도 꿀 수 없으니, 사람들은 시간제 일자리에 매달린다고 한다. 자신이 일할 수 있는 시간대에 자유로이 선택을 해 일을 하니, 선택의 기회를 준 기업에 감사해야 하나? 여기엔 교묘한 먹이사슬 구조가 숨어 있다.
흡사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나오는 미련한 농부를 보는 듯하다. 처음엔 조금 쉬운 주간조 일을 하다가 돈을 더 준다는 심야조 일로 확대하고, 휴일 인센티브를 노려 쉬는 날도 없이 주야로 혹사한 몸은 한계를 드러낸다. 네가 다닌 만큼의 땅을 주겠다는 악마의 속삭임과 무엇이 다른가?인간의 욕심은 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게 하릴없이 걷고, 일을 하다가 맥없이 죽어가고 있다.
구조화된 사회 속에서 악(惡)은 평범성을 띤다고 한나 아렌트는 말했었다. 비록 너무 심한 비약이라고 폄훼해도 어쩔 수없다. 우리의 산업사회 구조가 이런 비극에 맥없이 손을 놓고 바라보는 사이, 젊은 이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도로에 나서보면 전보다 수많은 오토바이가 보여 운전하기가 조심스럽다. 배달오토바이 사고는 개인용 오토바이에 비해 15배에 달한다고 한다. 배달 오토바이 전체 사용자가 절반가까이 일 년이면 두 차례 정도 생사를 넘나드는 사고를 당한다고 한다. 그들의 뒤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보면 어김없이 택배용 박스가 있다. 거기엔 우리가 먹을 음식과 사용할 물건 등이 들어있을 것이다. 편리하게 내 집의 문 앞에 놓인 택배용 가방 속에는 보이지 않지만, 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이 있음을 알기에 가슴이 답답한 새벽 운동길이 상쾌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