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 (~감사합니다)
시간은 여전히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많은 기회를 주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한정적이고, 나는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귀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아마도 지나온 시간의 여울이 넓게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요사이 좀 자유로워지고, 가을이 시작 됐다는 점은 마음에 든다. 한동안은 낮의 열기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여기저기를 쫓아 면접도 보고, 결과에 실망도 했지만, 이젠 그런 기억이 오히려 나에게 자양분이 된 느낌을 받는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한다. 살다 보면 인생은 변곡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가지고 있는 자본의 영향이 있기도 하고, 생각의 영향에 따라 부침을 겪기도 한다. 하루는 여전히 낯설다. 그러나 어릿광대의 흉내를 낼 수는 없다.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사람은 실패해서 포기하지 않는다. 지루해서 포기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이지만 공감 가는 바가 많다. 지치고 결과가 없을 때 흔히 슬그머니 놓아버리는 희망이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가끔씩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표정은 늘 여유 있게, 말은 강단을 잃지 말아야 했다. 딸아이는 나의 근황을 슬며시 체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은 슬그머니 내 손을 잡더니 한마디 건넨다.
"아빠! 힘들지!" 뜻밖의 소리에 나는 순간 왈칵 눈가가 젖어들었다.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위안의 소리에 마음을 들킨 듯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간과 비례해서 좌절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이런 감정은 이십 대의 막막했던 것과는 질이 달랐다. 나에게 남은 세월이 별로 길지 않다는 생각만이 심연을 헤매는 기분이 들고는 하였다. 지금부터 2~3년의 시간이 인생 하반기를 결정짓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기대하던 발표가 하나 있었다. 워낙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터라 내심 기대가 많았다. 그러나 결과는 예비합격이었다. 본사가 경남에 있는 곳이라 면접도 세종에서 있었다. 서울에서 1명을 모집하는 일이라 내심 불안 했으나, 결과는 애매한 불합격인 셈이었다. 깨끗이 포기하고,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았다. 어차피 붙었어도 4년이면 다시 정년퇴직을 해야 했다. 한편으론 여우의 신포도기제를 흉내 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지만, 현실은 마찬가지였다.
잊고 있던 사회복지사 일을 다시 상기시켰다. 나에게는 선택지가 있었다. 단, 경험이 없으니 나이 먹은 나를 누가 써주랴 싶어, 지레 포기한 사회복지분야는 내 후반기 2막의 근사한 청사진이기도 했다. 제대로 지원도 안 해보고 포기할 순 없었다. 취업 사이트의 이력서부터 다듬기로 한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단단한 내면을 가진 사회복지사' 나를 소개하는 제목부터 너무 상투적이고, 감흥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예전의 국문과 수업 시, 미국의 뉴욕인가에서 거리의 행인을 상대로 '나는 맹인입니다'란 표어를 앞에 놓고, 적선을 바라는 이를 보고, 지나던 프랑스 시인은 그 글귀를 바꿔주었다고 한다. '곧 봄은 올 텐데, 나는 그 꽃을 볼 수 없습니다!' 효과는 당장 나타나 그 부랑인의 초라한 박스엔 지나는 사람마다 적선의 손길이 이어저, 순식간에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온정이 쌓였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표제부터 바꿔보았다. '세월은 저를 단단히 여물게 했으나, 여전히 사람을 향한 그리운 사회복지를 꿈꿉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이력서의 자기소개 등을 채워 나갔다. 많은 곳의 지원보다는 집에서의 거리와 오랫동안 근무를 할 수 있고, 배우고 싶던 분야를 골라 두어 군데 지원을 해 보았다. 처음이 어려울 뿐 사회복지 분야는 정년이 없었고, 나의 의지와 사람들을 향한 긍휼 한 마음가짐이 있다면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수 있었다. 효과는 당장에 나타났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의 주간보호센터에서 자신을 센터장이라 소개하고 면접을 제안했다. 다시 자신감이란 놈이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또 다른 제안도 받았다. 서울의 경비원신임교육 전문 학원에 강사로 지망을 했었는데 과목 선택 겸 면접을 오라고 한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프리랜서로 강사를 하느냐, 사회복지사로의 길을 갈 것인가? 나는 사회복지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정중하게 다른 분야로 가기로 해서, 어렵게 기회를 주신 학원장 분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약속한 날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 약속대로 면접시간에 센터로 갔다. 센터장은 예상외로 꽤 젊은 여성이었다.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과 하실 수 있겠냐는 응답을 요구했다. 나는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기회를 주시면,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성의로 근무해 보겠다고 응답했다. 지원자가 30명을 넘어서 인지, 1명을 선발하는 사회복지사직은 연이어 면접 대기자가 나를 힐끔거리며, 대기실에 있었다. 홀가분하게 면접을 마치고, 기대는 접기로 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봐서 아무리 면접을 잘 봐도, 기대치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일들이 무덤덤하게 평정심을 가져다주었다.
이틀 후, 그 센터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자신은 센터장이고, 추천을 했으니 내일 최종면접에 대표분과 면접을 보라고 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음날 최종면접을 보러 갔다. 중년의 여성분과 마주하고, 짐작대로 대표란 분 같았다. 이런저런 질문이 있을 줄 알았으나, 부설 요양보호사 교육원과 방문요양센터 등을 설명하고, 주의할 사항과 내가 숙지할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는 채용계약서를 나에게 건네고 부탁한다는 당부의 말을 하였다. 내가 드디어 재취업의 문턱을 넘어선 순간이었다.
아득한 기분이 들었으나 펜을 들고, 또박또박 내 이름 석자를 기안서류에 적어 넣으니 지난 몇 달 동안의 다시 직업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안 되는 것은 없었다. 남들의 말에 휘둘릴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믿고, 열과 성을 다해 두드리면 문은 열린다는 진실을 마주한 시간이었다. 또 다른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여전히 배우고 도전하고, 사람들 속에서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나는 초임 사회복지사로서 모든 대상자들을 존중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등불이 되어주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며, 도덕성과 책임성을 갖춘 사회복지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내 인생의 또 다른 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봐주신 작가님을 비롯한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