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이었다.
고교학점제 시범운영 학교인 우리 학교에서 내가 맡은 첫 수업은 그것이었다.
더불어 진로수업도 맡게 되었다. 대개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비교과인 보건교사, 사서교사도 수업시수를 할당받아 교실에 들어가게 된다.
난 그것이 논리학이 되어 나타날 줄은 몰랐다.
진로 수업은 다행스럽게도, 같은 학년에 진로 수업을 들어가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나도 배워가는 입장으로 함께 논의했고 과연 성공적으로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로지 나 혼자서 꾸려나가야 할 논리학 교양 수업. 바다에 혼자 똑 떨어지면 이런 기분일까.
그래도 ‘논리학’이라는 어마무시한 단어 덕분인지, 다른 수업에 비해 해당 교과를 선택한 학생 수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멍청함을 구경할 사람이 이 학교에 몇 되지 않는다.
1. 질문
수업을 하기 위해 수업계획서, 평가계획서, 교과 세부능력 특기사항을 작성해야 하는 줄은 몰랐다. 매 시간 출석체크만 제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멍청하게 들어갔던 나는 쏟아지는 교내 메시지에 갈피를 잡는데 한참이 걸렸다. 도서실엔 나 혼자 있기 때문이다. 바로 물어볼 사람도, 자연스럽게 물어볼 누군가도 없었다.
학기 초에는 혼자서 어떻게든 이해를 하고 해내보려고 끙끙대다가 시간만 지체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나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고, 그걸 깨달은 나는 도서실에 오는 선생님 아무나, 복도를 지나가는 선생님 아무나, 화장실 갔다가 나올 때 마주치는 선생님 아무나를 부여잡고 무턱대고 물어보았다. 하나를 물어보면 늘 다섯을 알려주시는 선생님들은, 도서관에 혼자서 일하니까 좋겠네요~ 하면서 들어오셨다가, 혼자 있으니까 진짜 힘들겠네~ 하면서 나가셨다.
임용고시 면접을 준비할 때 그토록 강조했던 소통. 그 소통을 말할 때마다 나는, “학교는 공동체입니다. 개인 혼자서 할 때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생각으로 힘을 모을 때, 보다 현실적이고 성공적인 방향으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위의 말을 했었다. 근데 막상 도서실에 앉아서 실제로 사서교사가 되어보니, 다른 선생님들에게 피해가 될까봐, 내가 부담스러우실까봐, 학교에 짐이 될까봐 질문하고 이야기를 건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 혼자 가만 앉아 있으면 절대로 나아갈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학교는 혼자서 굴러가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업무가 아니면 절대로 모를 수밖에 없는 일을 왜 나는 모르는 걸까, 하는 건, 아주 바보 같은 일이었다.
모르면 물어보자. 내가 모르는 건 아무도 안 알려줬기 때문이니까. 사실 물어보기 전에 들었던 생각만큼 현실은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를 얻으려 움직이면 대여섯을 얻게 되는 일이 많았다.
사회초년생은 그렇게 질문에 대한 두려움을 잘 해내고 싶은 호기심으로 개선해나갔다.
2. 비교과 교사
수업 구성안은 교생 때 한번 작성해봤다. 내가 실습한 학교는 중학교였다. 45분 수업을 분 단위로 쪼개서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할지, 어떤 개념을 알려줄지 도입, 전개, 정리로 나누어 세부적으로 적는 것이 수업 구성안이었다. 선생님들은 수업하실 때 이렇게 치밀하게 구성안을 계획하신다. 교생이었던 나도 구성안에 따라 학생들에게 수업을 해보기도 했다. 그 수업은 도서관의 구성과 장서 배열 기준, 청구기호의 순서와 도서관 이용법과 관련된 수업이었다. 사서교사가 마땅히 제공해야 할 지식이었으므로 자신 있었다.
그러나 논리학 수업을 하기 위해 작성해야 할 수업계획서와 평가계획서는, 논리학이라는 학문 조차 너무나 생소하고 어려운데, 난생처음 보는 양식과 구성이었다. 그것은 학과의 전공 수업과 교직이수 과정과 교생 실습이라는, 내가 사서교사가 되기 위해 거친 일련의 커리큘럼 자체에서 듣지도 보지도 접하지도 못했던 문서였다.
나는 사서교사가 수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과 교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서교사도, 도서관 이용교육, 독서교육, 정보활용교육 등 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 수업이 ‘교과’가 아니어서 우리는 ‘비’교과 교사이구나,라고 납득했다. 즉, 본격적으로 수업을 짜고 학생을 평가하는 ‘교과’ 수업을 하는 교사는 아니란 것이다. 사서교사는 학교 내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교과 선생님들에게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정보원과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안내한다. 또한 도서관을 활용해서 수업을 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적어도 내가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철저하게 외운 이론서들은 그렇게 말했다. 만약 교과 교사와 함께 같은 질의 수업을 제공해야 했다면, 그들을 양성하는 커리큘럼과 그들을 선발하는 임용고시의 평가 기준의 다름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수/미이수로 평가되는 이 교양 수업이, 과연 내가 생각하는 ‘교과’에 해당하는 것인지, 나는 우선 그것부터 이해해야 했다. 학생들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활동’을 넘어 ‘평가’까지 해야 하는 이 수업이,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사서교사로서 제공할 수 있는 수업에 해당하는 것인가?
결국 나의 결론은 논리학은 비교과가 아니다,였다. 새로운 ‘고교학점제’라는 제도에서, ‘논리학’을 대하는 사서교사의 입장은 어떠해야 하며, 앞으로 모든 고등학교에 정착될 이 제도에 따라, 미래에 사서교사가 맡게 될 과목의 불안정성에, 나는 걱정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보건교사는 ‘보건’이라는 과목이 바로 떠올랐지만, 사서교사는 떠오르는 과목이 어쩐지 애매하고 두리뭉실했다. 특히 문헌정보학이라는 학문을 낯설어하는 사람에겐 더욱 그랬다. 교육과정 부장님이 내가 맡을 과목으로 ‘출판과 편집’에 관해서 질문을 해오실 때 나는, 미래에는 고교학점제의 다양한 교과들 중에서 사서교사가 맡게 될 과목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었으면 좋겠다는 뚜렷한 생각이 들었다.
독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어과에서 제공하는 수업이다.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사서교사에게 독서는 전공의 일부 중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한 나의 전공은, 책을 비롯해 정보를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을 체계적으로 구축해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학문이었다. 책, 출판, 정보, 서비스, 데이터베이스, 컴퓨터, 아카이브 등등 우리가 정보를 이용할 때 사용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의 집합체였다. 이 매력적인 학문에서, 사서교사가 고등학교 고교학점제 교양 수업으로 제공할 수 있는 특정한 과목은 과연 무엇일까.
2025년부터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된다. 사서교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나의 우선적인 대답은, 사서교사를 양성할 때 ‘수업’ 자체에 대한 전문성을 길러주는 게 가장 시급하다. 수업 자체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얕은 채로 맞닥뜨린 ‘수업’은, 나에게만 부족하면 그나마 나으련만, 학생들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선생님인데 수업하는 게 왜 어려워?”
수업에 대한 어려움을 말할 때 이해받지 못하면 화가 나고 억울하기도 했다. 수업하는 걸 안 배웠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교과 교사와 비교과 교사의 커리큘럼에서부터 임용고시 평가 기준, 사서교사의 역할까지 방대한 이야기를 변명처럼, 또, 풀어내야 했다. 내가 왜 수업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교과 교사라고 수업이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다만 나에게 수업이 더 쉽지 않은 이유는, 내가 납득하고 있던 비교과 교사로서의 수업이 아니었고, 그 내용이 난생처음 접하는 ‘논리학’이라는 학문이었고, 수업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었으며, 난생처음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도서관이 아니라 온라인 상에 개설된 교실이라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얼굴도 모르는 우리가 랜선에서 만나는 만남이, 학생도 교사도 참 낯선 학문으로 연결되어야 할 그 행위들이, 무서웠다.
3. 수업
생소한 학문에 대해 수업하고 평가할 계획서를 작성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처음 배우는 학문을, 내게 의지하여 누군가가 난생처음 배우게 되는 일이니,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가르치는 사람이 자신이 없는데 수업이 정상적일 수 있을까 싶었다. 나도 잘 모르는 지식을 학생들 앞에서 전문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들을 지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신규로 발령받고 온라인 클래스가 나름대로 정착되고 나서도 도서관 운영에 심혈을 기울일 수 없었던 것은, 우리 학교 도서관이 상당히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를 차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를 믿고 수업을 들을 학생들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들으라고 해서 듣는 수업도 아니고, 본인이 ‘선택’해서 듣는다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기대와 바라는 바가 있다는 뜻 일터이니. 나는 그냥 수업에 들어가는 게 미안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어쩔 수 없이 맡은 수업이었대도, 열심히 준비하고 싶었다.
제일 먼저 온라인 클래스에 본인이 논리학 수업을 듣고자 한 이유와 듣고 난 뒤 변할 자신의 모습을 댓글로 남겨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수업을 선택한 이유와 기대를 알아야 나도 논리학 수업에 대한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임용고시 2차 면접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보았던 교육 다큐멘터리들이 생각났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수업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들이 수업을 어떻게 구성할지 논의하고 함께 꾸려나가는 그런 수업. 책상에 앉아서만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토론하고 생각을 공유하고, 무언갈 만들어내고 발로 뛰어다니는 그런 수업. 첫 시작부터 그런 것을 시도할 용기도 아이디어도 없었지만, ‘논리학’이라는 수업에 대해 아이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것만으로도, 이 수업이 나 혼자서 무언가를 제공하기만 하는 그런 수업이 되면 정말 재미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이 수업을 들음으로써 향상되고 싶은 것들을 댓글로 적어주었다. 그것들은 내가 무슨 지식을 알려준다고 해서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느끼고 깨달아야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내가 말한다고, 강요한다고, 알려준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만의 것을 만들 수 있는, 그 필요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