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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볕 Feb 26. 2020

내가 태어나서 말한 첫 문장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거다. ‘내 기억의 시작은 어디일까.’ 나의 첫 기억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해봤는데,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했다. 혹은 둘 다 아닌 듯도 했다. 엄마, 아빠에게서 들었던 말이 내 기억으로 둔갑한 것일 수도.

     

그럼 이번엔 좀 더 쉬운 거. 내 기억의 시작은 순전히 내 머릿속에 있는 거라 그 누구도 말해줄 수 없지만, 처음 내뱉은 말은 가족들의 기억에도 있기에 훨씬 명확하다. ‘엄마’라는 말을 가장 먼저 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나의 경우엔 ‘아빠’였다. 만나는 사람 모두를 ‘아빠’라고 칭했단다. 아직도 아빠는 굉장히 뿌듯해한다.     


한 단계 나아가서. 그렇다면 나의 첫 문장은? 단어는 무의식적으로 내뱉기 쉽지만, 문장은 일련의 생각을 거쳐 만들어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완성한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정답은 , 방구  꼈으면 조케떠!(해석: 할머니, 방구  뀌었으면 좋겠어!) 뜬금없지만 사실이다. 당사자가 들은 팩트다. 내가 두 돌 무렵, 나를 낮잠 재우려던 할머니가 침대에 누워 방귀를 뽕 뀌자, 내가 턱 하고 말한 내 인생의 첫 문장. 할머니는 이 말을 듣자마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세상에, 우리 아기가 이렇게 긴 말을!!!”

     

그날 저녁 밥상 주제는 단연 할머니 방귀에 대한 나의 부탁(?)이었다. 아니 처음으로 말한 문장이 이거냐며 모두들 깔깔 웃음을 터뜨렸고, 현실화될 수 없는 청을 받은 장본인인 할머니는 첫 문장의 대상이 당신이란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고 한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웃겼지만, 납득이 됐다. 할머니는 내 첫 문장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한, 내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로 이 공간의 처음을 시작하려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을 몸소 겪은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억척스러운 엄마, 누군가의 귀여운 막내딸, 여전히 예쁜 옷에 관심이 많은 보통의 여자. 손맛이 끝내주는 우리 집 1등 요리사이자 뭐든 털어놓을 수 있는 단짝 친구. 무엇보다 내게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을 퍼준, 내 아빠의 어머니.


예전부터 할머니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다 보면 여러 가지로 얻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재밌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가끔은 명언 제조기처럼 인생 명언을 툭툭 투척해준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할머니의 자취를 남기고 싶어서다. 우습게도 이별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커졌다. 할머니에게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었고,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나는 그때의 기분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할머니와 함께하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언젠가 맞이할 슬픔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죽음이란 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온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중에 가물가물해진 내 기억을 탓하지 말고 그녀의 이야기를 기록하자. 그리고 오래오래 꺼내 보며 안아주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테마 내에서의 글은 철저히 나를 위한 기록이라 할 수도 있겠다. 우리 할머니는 참 따뜻한 분인데, 그런 할머니의 온기를 미약하게나마 재현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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