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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볕 Feb 27. 2020

그녀의 취미

할머니의 가장 큰 취미는 화초 키우기다. 할머니가 가꾼 푸릇한 것들은 할머니의 집뿐 아니라 우리 집 베란다까지 차지한 지 오래다. 이제 충분하대도 “이래야 사람 사는 집이지!” 하는 그녀였다. 투덜대면서도 싫지만은 않았다. 사실 나는 화초보단 화초를 가꾸는 할머니를 바라보는 게 좋다.

 

울긋불긋 거친 손이 연약한 새싹들을 어루만지고, 깊게 팬 손등 주름 사이로 진갈색 흙이 쏟아져 내린다. 살짝 굽은 등으로 쭈그려 앉아 열중한 뒷모습. 베란다 문턱에 누워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든다. 그 느낌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은데, 달리 뭐라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애잔하고, 평화롭다.


할머니가 화초와 나누는(?) 대화를 감상하는 것도 재미 중 하나다. 화분 갈이를 할 때는 “아이고, 이만큼 컸는데 내가 늦게 갈아줘서 답답했지?” 물을 줄 때는 “목말랐지? 많이 먹고 쑥쑥 커라.” 여름엔 “너희 더웠지?” 겨울엔 “너희 추웠지? 이불(화분 바람막이)이 얇아서... 자, 햇볕 좀 쫴라.”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진짜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 거다. 왜 맨날 화초에 말을 하는 건지 물으면, 그때마다 할머니는 “화초도 생명이니 다 알아듣는다.”고 하셨다.


얼마 전 발견한 따끈따끈한 난(蘭) 꽃봉오리. 잎 사이로 소중히 품고 있는 모습이다.


언젠가 뉴스에서 봤는데, 실제로 식물도 긍정의 말을 들으면 더 잘 자란다고 한다. 이게 할머니가 화초를 잘 키워내는 비결인 걸까? 할머니의 손길이 닿는 화초들은 매일 하루 한 번씩 이 말을 들으며 산다. “잘 커줘서 고맙다. 나도 성의껏 길러줄 테니 너도 잘 자라줘라.”


그리고 나도 그렇게 자랐다. 나 역시 그녀의 손이 일궈낸 산물이니까.

어쩌면 그 묘한 동질감 때문에 할머니의 화초 가꾸는 모습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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