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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볕 Mar 03. 2020

꾹꾹 눌러 담은 마음에 대하여_上

프롤로그     

나는 취준생이다. 어느 기사를 보니 작년 취준생이 71만 4000명가량으로 13년 만에 최다를 기록했다던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다. 취업 준비의 세계에도 새내기가 있다면, 딱 나다. 작년 가을 공채부터 뛰어들었으니 그리 오래되지 않은 셈. 지금이야 슬쩍 발을 담가본 뒤라 그때의 나에 대해 이랬었구나, 저랬었구나 하고 평가할 수 있지만, 지난 하반기 당시의 나는 그야말로 얼이 나가 있었다. 취업 준비 자체가 처음인 데다 내 주변엔 나와 같은 분야를 준비하는 사람이 없어 정말 생으로 모든 과정을 홀로 헤쳐가야 했다. 외롭고, 두려웠다.


그래도 꽤 긍정적인 결과들이 있었다. 특히 기대도 안 했는데, 운 좋게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곳에 면접까지 보게 됐다. 사람이 참 웃긴 게, 결과가 눈앞에 보이니 욕심이 생긴다. ‘이것만으로도 굉장한 경험이야’ 하며 매일 마음을 비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머릿속 한구석에선 희망 회로가 슬슬 가동된다. '혹시... 설마?' 응, 아니야. 어찌 됐든 일단 기회가 주어졌으니 잘하고 싶었다. 필기 발표가 난 후 면접 날짜까지는 1주일의 시간이 있었다. 나름대로 면접 예상 질문을 뽑고, 진심을 담은 답변을 준비했다. 형광펜을 칠해가며 자소서를 읽고 또 읽고, 허공에 대고 시뮬레이션도 했다.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갔다. 1주일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너무, 너무 짧았다.




몇 군데 지원하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그렇다 보니 혼자 집중하고 몰두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9월 중순부터 시작했으니까 그때부터 할머니를 잘 보지 못했다. 할머니와의 시간은 하루 한두 번의 짧은 전화로 족해야 했다. 할머니에겐 일거수일투족을 말하지 않고, 그냥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도만 말씀드렸다. 필기시험이나 면접은 바로 코앞에 닥쳐서야 넌지시 이런 일정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는 그 기간 내내 마음 졸이고 애태우며 하루하루를 보내실 것이기에. 괜한 실망감을 안겨 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원래 할머니는 내가 집에 있는 걸 알 때면 편히 전화를 하셨는데, 취업 준비 중이라고 말씀드린 후부터는 전처럼 전화를 걸지 않으셨다. 우리 할머니가 제일 싫어하는 게 자식들 공부 방해하는 거다. 혹여나 손녀의 집중을 깨트릴까 봐 할머니는 내가 먼저 전화를 걸더라도 다른 때와 달리 “잘 있으니 어서 끊어라” 하셨다.


일이 생긴 때는 11월, 면접을 앞둔 며칠 전이었다. 할머니는 면접이 예정된 사실은 아직 모르고, 언젠가 있을 시험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고 계신 상황이었다. 면접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유독 그날따라 할머니에게 전화가 자주 왔다.

-할머니: "손녀, 뭐해? 공부해?"

-나: "응, 그렇지. 할머니, 왜 무슨 일 있어요?"

-할머니: "아니, 일은 무슨 일.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집에서 하냐?"

-나: "응, 집에서 공부해요. 근데 할머니 오늘 이상하다?"

-할머니: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얼른 해라."

이런 내용의 통화를 세네 번은 했다. 내 직감으로는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망설이고 계신 것 같았다. 그런데 한동안 전화가 잠잠해 아닌가, 하고 말았다. 전화가 안 온 지 3시간쯤 됐을까. 할머니한테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겠다 싶었다.

-나: "할머니, 나한테 할 말 있지!"

-할머니: "지금 느이 동네다.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


이런, 당했다. 할머니는 오늘 아침부터 (아니 어쩌면 훨씬 예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짜고 있었던 거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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