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jin Oct 16. 2024

인생도 옮겨심기가 될까요?

세 달 전 사둔 뉴욕행 편도티켓의 출국일이 10일 앞으로 다가왔다. 회사에 남은 짐들을 작은 상자에 담아 원룸으로 가져왔다. 현관을 열고 들어오면 내가 머물던 장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작은 공간인데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을까.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현관에 서면 숨이 막힌다. 어쩔 수 없이 또 버려야 하는구나. 겨우 이 한 몸을 건사하는데 왜 이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했을까. 열흘 뒤면 8평 원룸의 삶은 23kg짜리 2개의 캐리어에 모두 담길 것이다. 나는 무엇을 담고 무엇을 버리고 가야 할까.



올해 초, 오랫동안 기다렸던 영주권 승인 과정이 모두 마무리되어 공식적인 이민자가 되었다. 오랜 기다림에 지쳐갈 때쯤 재기된 승인 절차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루 단위로 촘촘한 데드라인과 정확하게 준비돼야 하는 수 십 가지의 서류들, 모든 과정이 조마조마한 징검다리를 건너는 듯, 설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경험이었다. 영주권 승인 절차의 마침표는 내가 미국 땅을 밟고 입국심사를 통과하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나는 서울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 뉴욕에서 10일간의 휴가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영주권을 기다리며 지난 18개월간 내가 성장했던 도시에서 일종의 유예 기간을 보냈다. 헤어짐이 정해진 전연인과의 짧은 재회 같은 기간이었을까. 처음 서울을 떠나 유학을 갈 때와는 달리 오묘했다. 나는 여전히 기존에 주어졌던 나의 의무를 다 하면서도 곧 이곳을 떠날 사람으로서의 해방감을 느꼈고, 편리함과 익숙함이 그리고 이 도시의 생동감이 물결쳐 다가올 땐 나는 왜 떠나려고 할까 자기 의심에 시달렸다. 돌아올 곳을 두고 떠날 때 와는 다른 형태의 두려움이 때때로 엄습했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잡을 수 없는 세월을 핑계로 고민을 미뤄왔다. 왜 떠나야 하는지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 지난 1년 반 동안 임시로 이어온 8평의 삶을 캐리어 2개와 편도티켓에 담아야 한다. 장롱 속에, 서랍 속에, 수납장에 담아두었던, 이 방에서 지내면서 언젠가 한번쯤은 필요했을 물건들을 하나씩 손으로 끄집어내 바라본다. “내가 이걸 뉴욕에서 다시 쓰게 될까?” 어떤 것들은 너무 쉽게 그려진다. 그것이 없이는 안심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물건들은 과거의 나를 부정한다. “도대체 이건 왜 여기 있을까” 그렇게 한참 고르고 고르다 보면 버려지고 부서질 물건들에 죄책감이 고개를 든다. 이 불편함을 덜어보고자 자꾸 지인들에게 사진을 보내 “이거 필요하지 않아?” “당근에 나눔 하면 가져갈까?” 질척여본다. 혼자 이 작은 방에서 겨우 일 년 반을 지내놓고 유난을 떠는 나 자신이 불편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버리고 무언가는 버려져야 한다. 다시 헤어지는 일은 이렇게 칼 같이 깔끔한 단면으로 잘려야 하는 것인지 나는 몰랐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 같은 이유로 또 헤어진다던데… 돌이켜보면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내내 서울에서 늙어가는 나를 자연스럽게 상상한 적이 없었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 늙은 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게 쉬워진 것인지, 서울과는 언제나 거리감을 갖고 살았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저 서울이 아닌 어딘가에 있는 나를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울 뿐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인 줄 알았다. 이민도 그저 이사 가는 거라고. 같이 지내던 물건들 거기로 옮겨 놓고 지내는 것뿐이라고. 별 일 아닌 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했을 뿐인데,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건가 겁이 나는 걸 막을 수가 없다.



한참 어지럽혀진 물건들을 캐리어 한편에 정리하고 보니 거기 담긴 내가 보인다. 나는 정성스레 접고 접어 나를 담아내며 내가 아닌 (혹은 내가 아니었으면 하는) 것들을 버리고 있다. 서울에서는 나답게 살지 못한다고 느꼈었는데 두 개의 캐리어에 삶을 담아내니 내가 담겨있다. 뿌리를 모두 땅 밖으로 꺼내 흙을 다 털어내고 이끼 위에 담긴 인삼처럼 담긴 내가 있다.






어디든 정착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뿌리내리고 산다고 표현한다. 이민은 새로운 땅에서 내 뿌리를 뻗어나가겠다는 선택이고, 나는 그 선택을 오래전에 했던 것임을 알아차린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부서질 줄 알면서도, 내가 어떤 나무가 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땅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그곳은 천국일 수도, 지옥일 수도, 혹은 그 중간 어디일지도 모르는 불확실성에 배팅을 거는 도박. 나는 그렇게 텃밭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답을 정답지에서 지웠다.


마침내 미뤄온 질문에 답을 적어본다. 씨앗은 뿌리내릴 땅을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싱그러움을 느껴야 숨 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바람에 실린 민들레 씨처럼 푸르름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이민은 그저 이렇게 생긴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곳을 떠나 살아야 하는 사람임을 받아들이고 희생과 어려움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뿐이다. 


텃밭을 떠난 나무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2개의 캐리어와 함께 답을 향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