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요구한 내용이 모두 잘 녹아있는 것 같아요."
“저희가 요구한 내용이 모두 잘 녹아있는 것 같아요”
그동안의 고민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이직 후 첫 PRD(Product Requirement Document, 제품 요구사항 정의서) 리뷰를 마치고 들었던 말이다. 진행을 하면서도 ‘내가 과연 잘 이해를 하고 기획하는 걸까?’, ‘프로젝트가 엎어지거나 방향성이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깔려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동안 했던 고민들이 싹 녹아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 회사에서는 처음 했던 기획이라서 많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 말을 들었을 때 만큼은 굉장히 뿌듯했다.
우리는 잘 읽고 이해한다고 생각해도, 사실은 그 글이 담긴 의미와, 그 요구사항을 만족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일과 앞으로 해야할 일을 그려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독해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사람마다 일하는 방식에 따라 사고방식이 따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예를 들어 심플하게 해달라는 말을 누군가는 ‘불필요한 기능을 삭제해달라’고 이해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톤앤매너를 단순하고 보기 깔끔하게 해달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요구사항을 만족하는 기획을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PM은 여러 사람들과 협업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내가 지금 대화하는 이 사람이 어떤 일을 해왔고 어떤 업무를 맡은 사람인지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말 속에 숨은 의미를 파악하기는 정말 어렵다고 느낀다.
현업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해서 각자 주로 어떤 일을 하는 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업무 프로세스가 어떻게 되는지를 물어본다면 가장 빠르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가급적 모든 회의에 참여해서 그사람들이 어떻게 업무 협의를 하고, 어떤 프로세스로 일을 하는 지를 들어보고, 회사 wiki에서 히스토리를 찾아보는 것이 최선인 것 같다. 그런 노력을 하다 보면 그들이 요구하는 사항이 뭘 의미하는 지를 잘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처음 1년 반동안 일 했던 스타트업에서는 스마트워치와 스마트체중계를 판매했었다. 비교적 고가의 기기들이다 보니, 입출고와 재고관리가 중요했다. 그래서 물류 관리 시스템을 기획하기로 결정하고, 나는 평생 사용해보지도 않았던 물류어드민 시스템 기획을 맡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을 했던 건 처음이었다. 시니어 풀스택 개발자, 9년차 재무팀장님과 팀이 되어 진행했는데, 주니어인 나에게는 마치 어벤저스와 초딩이 한 팀이 된 느낌(ㅋㅋㅋ)이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 분들은 나를 1인분의 역할을 하는 기획자로 생각하고 믿어주었고, 이에 힘입어 더 책임감을 가지고 끝까지 기획을 잘 할 수 있었다.
1년가량 지난 지금은 내가 기획했던 물류시스템을 이용해서 주문확인-송장발행-재고관리까지 2시간이 걸렸던 업무는 비교적 간단한 업무로 바뀌어 있었고, 수정과정을 거쳐 실무자가 더 사용하기 편한 어드민으로 유용하게 쓰고 있다고 들었다. 기획을 했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을 했지만, 사용성을 높여 잘 쓰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벅찼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한 프로젝트였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한 경험은 앞으로 다른 서비스를 맡더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지금도 경험이 부족하다고 항상 느끼지만 그래도 끝까지 프로덕트를 책임지고 끌고 나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다.
일에 치여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문득 ‘내가 잘 하고 있는건가?’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1년 전 내가 어땠는지를 돌아보면 도움이 된다. 1년 전 나는 물류어드민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만약 지금 그 일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 때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1년 전의 나는 기획서도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 지를 몰라서 엑셀로 기획서를 작성했었다. 또 데이터 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기획을 해서 개발자에게 혼란을 주는 기획서이기도 했다. 얼마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잡아줘야 하는지도 감을 잡지 못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한 화면에 15개씩 100개의 row를 스크롤다운 해서 보여주고, 100개가 넘어가면 페이징처리를 한다는 등의 디테일까지 잡아내지 못했던 것 같다. 어드민에 업로드하는 엑셀파일 형식도 왜 잡아줘야 하는 지 몰랐던 것 같다.
지금 내가 그 일을 다시 하게 된다면, 먼저 다양한 어드민 형태를 리서치 해보고, 레퍼런스가 될 만한 어드민을 분석했을 것 같다. 이후 기획서를 작성할 때는 UX를 보여주기 어려운 엑셀보다는 ppt나 피그마를 통해 웹 화면을 설계하고, 화면 별 디테일한 요구사항을 넘버링 해서 보여줄 것 같다. 업로드나 다운로드 받아야 하는 엑셀파일이 있다면 헤드명과 서식, 예시까지 개발자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정해서 첨부했을 것 같다.
이렇게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내가 어떤 부분에서 성장을 했는지가 보이는 것 같다. 만약 1년 전의 나보다 지금 성장했다면 다시금 내가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에 집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