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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미 Oct 18. 2020

삿포로 2

All I've ever known 


시간이란 참 묘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괴롭고 추잡했던 순간도, 눈물 날 만큼 행복했던 추억도 모두 그저 무난히 지나온 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다시 무난한 그 시간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초월자 같다. 지금 느끼는 슬픔, 기쁨, 분노, 절망 이런 감정 따위 내일이면 아무렇지 않아지고, 다음 달엔 그런 일이 있었나? 싶다.

계획한 것의 반도 달성하지 못한 삿포로의 첫째 날.

날씨가 시원할 걸 알았고 그걸 바라고 온 거지만 마음이 시려서인지 춥게까지 느껴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항에서 사 먹은 빵에 체해 속까지 안 좋다. 바람은 좀 불어도 맑은 금요일 저녁이라 젊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들떠서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나도 그냥 서울에서 친구들이랑 졸업 기념으로 술이나 진탕 마실걸, 굳이 혼자 여기에 와서 체하고 춥고 이게 뭐냐' 서글픈 생각까지 든다. 누가 나보고 삿포로 가!! 라고 몰아세운것도 아닌데 이렇게 나는 가끔 나 자신에게 미안할 일을 저지르곤 한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철저히 이방인인 상태로 삿포로 시내를 걸을 때 내가 있는 곳은 가로등도 없이 어두운데, 저 건물은 너무 밝고 마치 나에게 벽을 치는 것 같아 이 사진을 남겼다. 오랜만에 이 사진을 보았을 때 네온사인 색이 참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찍은 거지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외롭고 서글프고 찌질한 그 생각이 나는거다. 어떻게 건물이 사람한테 벽을 치냐고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생각인데 그땐 쟤만 저렇게 밝은게 그렇게 서러울 수 없었다. 삿포로에서 참 좋았다는 기억밖에 없었는데 이 사진을 보고 나니 삿포로는 사실 괴로운 여행이었다. 원하는 초밥집에 가지 못하고, 숙소 예약이 꼬이고, 양고기를 못 먹고, 삿포로 맥주를 파는 적합한 곳을 찾지 못하고, 외롭고, 돌아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찌질한 푸념뿐이다. 근데 그 찌질한 것들이 무더기로 오는 순간에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슬퍼지는 거다. 인스타에 올리는 사진만 그럴싸하지 내 여행은 생각보다 찌질함 투성이다.

이렇게 사진을 고르고 글을 쓰는 일이 발라드, 락, 힙합 이렇다할 취향없이 듣기 좋은 노래를 추가한 플레이리스트를 랜덤재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때 좋았던 노래가 지금은 소음처럼 들리기도 하고, 여전히 좋기도 하고 그렇게 굳이 굳이 들추고 싶지 않은 시간도 불현듯 다시 만나게 되고 그때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이 다음엔 무슨 사진이 어떤 시간을 떠올리게 할까. 두렵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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