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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Jan 18. 2024

지랄 맞은 인정욕구

소견서를 들고 교감 선생님을 찾아갔다. 아직 마음이 힘들어서 3학년 부장을 못 맡겠다고 말씀드렸다. 올해는 수업 시수가 많이 늘어난 데다가 부장 업무가 작년과 달리 많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부담이 크다고 했다.


"안타깝네요."


그는 내 소견서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소견서에 적힌 병명은 상세불명의 우울에피소드, 공황장애, 사회공포증이었다. 그는 내 병명을 읽었으나 이 병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면 1학년 부장은 어때요?"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업무 부담 때문에 의사 소견서까지 들고 간 내게 다른 부장을 제의하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예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그가 말했다.


"제가 보기엔 선생님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역량이 된다니까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많고 많은 교사들 가운데 나를 콕 집어서 업무를 맡긴다. 평소에 그는 나를 눈여겨본 것이 틀림없다. 내가 일을 잘하고 훌륭하게 해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내 능력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 준다. 그 누구도 내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잘할 수 있단다. 기분이 좋았다. 


그는 업무 분장표를 보여주면서 1학년 부장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나는 자유학기 업무와 교복 및 생활복 업무, 반편성, 1학년 체험학습 추진 등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의 설명만 듣고 1학년 부장의 업무가 간단하며 어렵지 않다고 느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거듭 말했다.


"선생님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아요. 어려운 지점, 그 고비만 넘기면 돼요. 의지로 극복할 수 있어요."


나는 그의 말에 빠르게 빠져들었다. 자기 객관화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의 말에 홀라당 넘어갔다. 불안과 우울. 이걸 기본 베이스로 깔고 있는 내가, 항우울제 말고도 여러 종류의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는 내가 의지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 수 있다고 나를 독려하는 사람이라니. 새삼 그가 고맙게 느껴졌다.




저녁에 남편과 통화를 했다. 오늘 상황을 설명하니 그가 말했다.


"누구나 하려는 업무였으면 자기한테 차례가 오지 않아. 아무도 안 하려니까 자기를 붙잡고 하라고 등 떠미는 거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작년 12월 말에 전 교사가 업무 희망서를 냈다. 그 누구도 1학년이나 3학년 부장을 희망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가 공석으로 남았고, 어쨌든 그 자리를 채워 넣어야 하는 교감 선생님 입장에서는 일 잘하고 거절을 잘 못하는, 경력도 제법 되는 내가 적임자였다. 내 상황이 어떠하든 그는 나를 설득해야 했다. 그래서 1학년 업무가 어렵지 않다고 말했으며 당신은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바보 같았다. 내 안의 인정욕구가 나를 죽일 뻔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은 정말 기쁘고 행복하다. 하지만 인정받기 위해 무리하게 나를 혹사시키거나 내게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 주려고 할 때 나는 소진될 게 뻔했다. 우울증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게다가 그는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나처럼 아픈 사람과 일해 본 경험이 전무한 듯 보였다. 내 능력을 높이 사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격려해 준 점을 고마웠지만 내가 그 일을 맡았을 때의 상황을 그려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학년 부장이라면 업무분장표에 없는 일도 많이 한다. 각 반의 사건사고 같은 경우에 담임 선에서 해결되지 않을 경우 학년 부장이 2차로 해결해야 하고, 각종 회의에 쉴 새 없이 들어가야 한다. 우리 반만 책임지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학년부 선생님과도 원활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내 마음 하나 똑바로 다스리지 못해 약을 먹으며 살고 있는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스스로 한계를 짓고 말고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내가 선택받았다고 해서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다고 느껴서 덜컥 업무를 맡으면 안 된다. 




나는 나를 돌아봤다. 어릴 때부터 착한 모범생으로 살아왔다.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고 내 존재가 빛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살다보니 늘 나를 혹사시키거나 내 안의 욕구를 죽이며 살았다. 


이제는 좀 달라져야 되지 않을까?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고 정확하게 말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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