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에 학생들을 '아기새'라고 불렀고, 수업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악어새'라고 바꿔 불렀다. 아기새라고 부를 때마다 그들은 좋아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일까? 나 역시 그렇게 부르는 걸 기쁘게 생각했다. 순하고 몽글거리는 마음이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카리스마 따윈 결코 가질 수 없는 선생의 차선책이었지만 효과는 좋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다가온 학생들은 '아기새'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말했다. 이제 어디서든 자신을 아기새라고 불러주는 선생은 만나지 못하겠지. 나는 마음이 조금 쓸쓸해져서 입술을 앙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이별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솔직히 이별의 순간이 얼른 지나가길 바랐다. 1년 동안 가르친 학생들을 떠나보내는 선생치곤 마음이 무척 담담했으며 심지어 졸업식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졸업생과 학부모님이 떠난 강당 뒷정리는 나를 포함한 담임들 몫이었고,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교직원 회의도 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들의 옆에서 환히 웃었고, 안아 주었으며, 잘 지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라고 대답했지만 나는 내 신념대로 그들이 나를 완전히 잊어주기를, 다시는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나를 추억하며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길 바랐다. 작년에는 운이 좋아 학생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 와중에 나는 어떤 학생과 마찰을 빚었고, 끝내 서먹서먹한 채로 헤어졌다.
난 완벽한 선생도 아니고, 좋은 선생도 아니다. 그냥 조금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학생들보다 해당 분야 지식이 많다는 이유로 칠판 앞에 서서 떠드는 어릿광대 같은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이 나를 잊길 바랐다. 그래서 나를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이 찾아왔을 때의 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선생이 되어 바쁜 삶을 살고 있을 터였다. 삶에 치여 그들을 온전히 반기지 못할 내가 싫고, 그들을 귀찮아할내가 미울 테지.
내 마음은 이렇게 흘러갔지만 결국 어떤 학생들은 나를 잊지 못하고 오래오래 기억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아기새'라고 다정하게 불러주던 선생이 있었다고 누군가에게 말하며 내 안부를 궁금해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