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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Feb 29. 2024

나는 오늘 울지 않았다.

정말일까?

오늘 학교에서 두 분의 선생님과 은 마찰이 있었다. 내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고 내가 감수해야 한다는 말도 이해되지 않았다. 속이 상해서 집에 돌아오니 엄마를 목 빠지게 기다린 둘째가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화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는데 둘째가 자꾸 "엄마, 듣고 있어?"라고 묻는 바람에 소리를 꽥 지르고 말았다.


나를 닮아 눈이 나쁜 둘째가 안경알에 눈물이 묻을 정도로 서럽게 울었다. 자그마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슬퍼져 울고 싶었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엄마가 미안해."라고 사과하며 안아주었다. 둘째는 말랑하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나는 녀석을 안아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등도 토닥여주었다. 양쪽 뺨에 내 볼도 갖다 대며 비볐다. 그러자 녀석이 울음을 그쳤다.




새 학기를 앞두고 마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기피 업무를 맡은 데다가 난생처음 하는 일이라 신규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게다가 본교에서 수업 시수가 제일 많은 사람이 나였고, 엄청난 수업 부담감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내 다리와 목이 남아나질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업무며 담임 일은 언제 하나. 또, 우리 반에 선택적 함구증을 가진 학생이 배정되어 있다. 친구도 전혀 없고, 말도 안 하는 이 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면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 모든 게 두렵고 불안한 일 투성이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뿐이라는 비관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요 며칠을 보냈다.


걱정만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미친 듯이 수업 준비를 했다. 1학기 분량의 교재연구를 하고 학습지를 만들었다. 교과서며 교재며 참고서적을 이리저리 보는데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할 일이 산더미였는데 나는 그만 시 앞에 주저앉아 오래오래 울음을 참았다.


그날

그날, 텔레비전 앞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울컥 울음이 터졌다
멈출 수 없어 그냥 두었다
오랫동안 오늘 이전과 이후만 있을 것 같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밤,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했다


곽효환 시인의 작품이다. 나는 울지 못하고 참고 있는데 시의 화자는 실컷 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울게 만들었을까?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부럽다. 그렇게 오랫동안 울어본 적이 없었던 화자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렇게 울면서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우는 것도 견디는 방법 중의 하나겠지.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만이 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 시를 읽고 깨닫는다. 나는 눈물 없는 울음을, 마른 울음을 아주 오랫동안 울며 여기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오늘 겪었던 작은 마찰과 둘째의 울음을 통과하며 나 역시 마른 울음을 울며 그 순간을 견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게 싫어지는 날이었다. 교사가 된 게 형벌같이 느껴지던 때가 있었고, 매번 바뀌는 업무와 학생들 때문에 항상 허덕이며 사는 일도 20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교과서 한 귀퉁이에서 만난 수필(어제는 교과서에 실린 이순원 작가의 수필을 읽고 울었다), 교재 연구를 하려고 펴놓은 참고 서적에서 만난 시, 한 학기 한 권 읽기를 하기 위해 무수히 많이 읽었던 청소년 소설 덕분에 내가 꾸역꾸역 학교에서 살고 있음을 느낀다.


그토록 싫어했지만 이토록 오래 학교에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내가 문학을 사랑했고, 누군가와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길 즐긴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실을 잊고 살았는데 다시 깨닫게 되어 무척 기쁘다.


나는 오늘 다친 마음을 이렇게 다독인다.



최근에 읽은 청소년 소설과 교양 서적 (사실 한 권은 아직 읽는 중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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