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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스텔라 Oct 31. 2020

기만의 유효 기간: 11 시간

남편이 없는 11시간, 보통의 육아를 하며 생각했다

'다녀와' 라는 인사말은 3일을 못 가 '빨리와'로 바뀌었다. 현관문 사이로 그의 얼굴이 반으로, 반의 반으로 쪼개지는 장면을 바라보다 종이 한 장 낄 틈 없이 꼭 닫힌 문을 마주하면, 팔 안의 아기를 조여 안는다.

 "응 아가. 아빠는 이제 열한 시간만 있으면 돌아올 거야."


남편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칼같다. "나 지금 버스 타요." 집을 나선지 꼭 10시간 만이다. 그 짧은 통화가 찡하게 반갑다. 나는 스마트폰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유식 그릇과 사과를 간 강판, 젖병과 빨대컵 등을 정리한다. 이미 세척을 마치고 물기가 어린 깨끗한 가재도구를 다시 줄 세우고 각 잡는다. 무언가가 흐트러져 있으면 무성이해 보이거나 집안에서의 노동이 평가절하될 것만 같다. 남편이 올 시간이 다가오면 초조해지기 시작하는데, 묘하게 불안하기까지 하다. 이 초조함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남편은 가사와 관련해 어떠한 빈정의 말도 한 적이 없고 우리는 서로를 평가 대상으로 (대놓고) 조준하는 일이 드무니까. 설사 그런다 해도 썩 두렵진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한 시간 두 시간 줄어드는 간격을 체크하며 어떻게 기다린 열한 시간인데, 쾌재 대신 불편한 초조함이라니 이유를 알지 못해 더욱 불안해진다. 초조함의 안개 속에서 40분, 30분, 15분, 5분... 분 단위로 시간을 잰다. 머지않아 도어락을 밀어올리는 마찰음을 듣는다. 왔다. 드디어 아빠가 왔어. 성실한 남편이 웃음을 머금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그럼에도 내 안의 초조함은 멈추질 않는다.


평일 저녁이 가장 이상적일 장면은 이렇다. 남편은 돌아오자마자 신속하게 씻고, 단 십 분이라도 지체 없이 곧이어 식탁에 자리한다. 뭉그적거리거나 종일 벼러온 농담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식탁 위에서 입은 오직 음식의 출입에 집중한다. 대화는 반갑지 않다. 가장 이상적인 저녁은 전적으로 진행 속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누가 밥을 차리느냐 어떤 음식이냐는 중요치 않다. 수저를 들 환경이 제시간에 준비되고, 식후에 (누가 됐든) 뒷정리를 신속하게 마감하고, 아기가 잠들 때까지 집중력을 다해 놀아주다가 가능한한 이른 잠재우기에 성공한다. 피날레인 아기의 잠든 얼굴은 마침내 내게 한 줌의 자유가 허락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이상적인 저녁을 보낸 날도 위태롭긴 마찬가지다. 잠든 아기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단 하루의 예외 없이, 아기의 날숨을 베고 나란히 잠들고픈 유혹에 빠진다.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유를 누리기엔 육아에 지친 몸이 너무 무기력한 거다. 맥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자유를 보며 "내가 그렇지 뭐..." 중얼거리다 패배한다. 결국에는 하루에 두 시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자유를 붙드는 일이 그렇게나 어렵다.


물론 자유시간을 포기하고 자는 시간을 앞당기면 다음 날 조금 더 개운한 하루를 시작할 순 있다. 개운한 컨디션으로 눈을 떠서 조금 더 개운하게 기저귀를 갈고, 개운한 정신으로 젖병을 씻고 개운한 느낌으로 이유식을 준비하고, 또 여느때와 다름없이 저녁을 준비하면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아기와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일과를 마쳤다는 안도와 함께, 당장 눕고 싶어지는 또 다른 밤을 겪는다. 더 개운하거나 덜 개운하거나 일상은 거기서 거기다.


아이 곁에 그대로 눕고 싶은 유혹보다 자유의 본질적 문제는 공간이다. 자유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은 엄격하다. 어떠한 장면도, 냄새도, 소리도 미치지 못하는 철저한 독실이 조건이다. 아기의 냄새와 숨소리가 미치는 한 부모의 관성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육아 천재라고 해도 내 자유에 도움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체성이 부모인지라 한 명이 육아를 맡는 동안 다른 한 명은 바라보는 역할이라도, 아기를 향해 미소를 짓는 반응이나마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공간 속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소외시키는 모양이 되고 상대적으로 나는 부모답지 못한, 제 시간 갖겠다고 자녀에게 눈길마저 거둔 매정하고 얄짤없는 사람이 된다. 누구도 질책하지 않지만 아기를 외면하는 마음이 자유롭지 않다. 온종일 육아에 에너지를 퍼부은 쪽은 나인데, 막판에 그런 죄책감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내가 쉬려면 그 공간을 떠나거나, 아기가 한동안 깨지 않는 수면 상태에 진입해야 한다. 한밤 중에 집을 나오기는 어려우니, 어떠한 노동의 여지가 집안에 남아있지 않도록 일정을 속히 끝내는 수밖에 없다. 저녁식사는 즐기기보다 해치우는 편이 낫고, 아기를 대하는 일 외 나머지는 죄다 속성으로 하는 식이다. 가능한한 아기를 재우는 피날레를 앞당겨 한시라도 자유의 실체를 만나고 싶다.


남편의 도착 전화를 받고 초조해지는 이유는 애매한 현실에 있었다. 그의 귀가에도 내 일과는 마무리되기까지 아직이라는 팩트. 그가 샤워를 하러 가면 나는 식사 준비에 서두르거나 칭얼대는 아기를 마저 달랜다. 종종 그가 본인이 저녁을 차리겠다고 하지만 썩 달갑진 않다. 요리하는 동안 나의 육아는 계속될 테고, 식사 시간은 그만큼 미뤄지고, 뒷정리 시점마저 미뤄지므로. 한시라도 빨리 쉬려면 저녁 시간을 가능한 한 앞당기는 게 상책이다. 그리고 어서 아기를 재워야 한다. 마침내 육아에서 벗어났다고 믿는 그때가 오면 익숙한 허탈함에 빠지는데, 해방과 쉼을 원했던 나는 이미 고갈된 에너지로 눈알과 심장이 바짝 말라버린다. 우리집에는 독실도 없고.



나는 그저 하루가 저물기를, 아이의 곤히 잠든 얼굴을 마주하기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하루가 시작되자마자 일상의 여정이 아찔하게 아득해서 남편이라는 중간지점을 설정했을 뿐이다. 11시간만 버티자고 중간지점을 도착지로 속인다. 조금이라도 가까운 목표가 견디기 수월하니까. 저녁 6시 반, "나 지금 버스 타요."는 거짓 도착지의 기만이 밝혀질 때가 왔음을 의미한다. 11 시간을 기다린 남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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