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다' 말 못하는 이를 함부로 만지는 행위
-답답하게 뭐 저런 모자를 씌워놨어
-애를 저렇게 앉히면 어떡해 쯧
그렇게 키워서 되겠느냐는 식의 훈수는 얼마나 얼마나 모욕적인지, 당한 사람만이 안다. 절절한 마음으로 아기를 키우는 사람만이 안다. 햇빛에 얼굴을 찡그리고 힘들어 하니까 모자를 씌워준 거예요. 아무리 세워줘도 저 자세가 편하다고 비스듬히 앉아요. 마치 남의 아이를 잘못 돌보고 타박 맞은 사람처럼 변명하는 꼴이 더 처연하다. 애써 변명할 의무는 없지만 들으라고 던진 말을 못 들은 척 하기도 여간 소모적인 일이 아니다. 난처해진 남편과 내가 시선을 나누는 사이, 해명을 들을 틈도 없이 그들은 바삐 제 갈 길을 간다. 그저 말이 하고 싶었던, 지나치는 사람들일 뿐이다.
매일 나가는 산책길에 하루 거르는 날 없이 당했다. 나와 남편은 이런 모욕이 단순히 우리에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머리숱이 적다, 콧물 자국이 있다, 추워 보인다 등을 들리도록 크게 말하는 태도는 아기를 인격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멈춰 서서 마주하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행인이, 길 가는 아무나를 대상으로, "아저씨 콧등에 파란 점이 있네" "아가씨 추운데 스타킹 신지 그랬어" "할머니는 염색 좀 하셔야 겠다" 따위의 코멘트를 던지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렵다. 상식과 통념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기와 아기를 돌보는 부모에겐 수도 없이 마주해야 하는 장면이다.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타인의 외모, 신체 상태를 문제 삼는 행위는 무례하고 폭력적이다.
인격적 존중은 그 존재와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의 행동과 선택에 그만의 이유와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귀하게 믿는 태도다.
'꼬추 한번 만져보자'의 시절은 지난지 오래다. 그러나 아기를 기르고 보살피고 매일같이 산책 나가는 보호자로서 말하건데, 한국의 의식 수준은 아직 딱 그 정도에서 멈춰 있다. 능동적으로 거부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라고 다짜고짜 몸을 디밀어 아기 손발을 만지는 노인이 허다한 현실이다. 타인의 신체를 함부로 더듬어도 되는가. 타인의 신체는 그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사회적 기능을 하기에 미숙하더라도 엄연한 사람이고, 미숙한 아기의 인격은 부모가 대변한다. 적어도 부모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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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젊은 부모를 향한 무례한 비아냥과 평가가 끊이지 않는가에 대해 골몰히 생각했다. 왜 이것이 괜찮고 가능한 사회인가에 대해 통탄했다. 간절히, 당혹감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우리가 자가용만 있었어도 인구 밀도가 높은 대중교통에서 그들의 비아냥을 듣고 있진 않았을 테지. 그런 사람들이 오지 않는 쇼핑몰이나 키즈카페만 다녔다면. 남편은 그런 자책 비슷한 회의에 빠졌다. 그럴수록 나는 더 마음이 아렸다. 어째서 우리가 자신의 여건과 처신에 자책을 돌려야만 하지?
우리가 당면한 처지와 닮은, 사연들이 떠올랐다.
- 생각해서 한 말인데 발끈할 건 없잖아.
- 하도 예쁘니까 손 좀 만져 봤지.
- 예민하기는. 어른이 좀 만졌다고 어디가 닳나.
- 귀여워서 그랬다.
- 딴에 지 자식(자기 몸)이라고 되게 유난이네.
- 누가 보면 잡아 먹는 줄 알겠어.
싫다고 내치지 않거나 거부하지 못하는 약한 대상에게 치고 들어오는 인격 침해는 과거 여성들에게 행해진 치욕적 행위와 결을 같이 한다. 이 말이 과하다고 느끼는가. 단 10년 20년 전만 해도 여성은 위와 같은 말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면 예민 떠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자식 같아서 한 말을 가지고 왜 유난이냐. 때린 것도 아니고 예뻐서 만진 것을 범죄자 취급하느냐. 꼭 지금의 우리 이야기다. 아기도 다르지 않다.
아기는 그렇게 대해도 괜찮은가. '싫다' 말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을 내키는 대로 만지고 그 신체를 언급하는 일은 폭력이다. 아기 역시 사람이고 소중한 인격이다. 아기를 가진 젊은 부모 역시 중장년층과 노인에게 인생의 후배로 보일지 모르나, 해당 자녀에게는 대체 불가한 프로 양육자다.
넘어서지 말아야 경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