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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스텔라 Oct 28. 2020

아픈 손목에 안긴다

둘 중 하나는 아픈 손목을 당해야 했다

남편은 반년이 지나도록 손목을 회복하지 못했다. 아기를 안고 달래다 힘 좋은 몸부림에 꺾였고 한번 약해진 부위는 사소한 자극에도 비명을 불렀다.손 쓰기를 멈추지 않으면 나을 수 없다는데 끝내 무엇도 포기하지 않는 남편을 보니 심경이 복잡했다. 말릴 수가 없었다.


남편은 목욕 시키기나 잠 재우기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아빠의 손길에 익숙해진 아기가 칭얼댄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그 자신이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이 년이라고 말했다. 부모됨에 있어 한동안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에너지가 남다른 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누구든 다치게 될 일이었다고. 둘 중 하나만 아픈 게 낫다고도 했다.


영상과 데이터를 다루는 남편은 깁스한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불편해서 결국 깁스를 깨부쉈다. 그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했다가 수치스러웠고, 죄책감이 들었다. 자녀에 대한 책임은 똑같이 있는데 둘 중 하나만 아프다는 사실이 그랬다. 둘 중에 아픈 이가 내가 아닌 내 소중한 사람, 가장 가까이서 지켜줘야 할 배우자라는 사실이 그랬다. 성한 내 몸이 민망했다.


언젠가부터 육아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거짓말을 했다. 모든 일은 번갈아 반반씩 나누어서 하죠. 그렇게 해야 질타를 피할 수 있을 터였다. 네 배우자는 반년이 지나도록 손이 낫지를 않았다니, 뭐했니. 잘 조력했어야지. 질타한 사람이 없는데도 때마다 질타를 받았다. 속에서 내가 나를 후리는 질타였다. 묻지 않은 말을 주절거리기도 했다. 손빨래를 자주 했더니 일년이 지나도록 습진이 낫지를 않는 거 있지. 그러면서 검지를 가리켜 가장자리에 때 묻은 밴드를 보였다. 한 조각의 피부라도 눈에 띄게 고장난 부위가 있어야만 했다. 왜 중요하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다시 나에게 물었다. 남편의 손목이 떠오르면 떳떳하지 않아서 그랬다. 대신 깁스를 찼어야 했을까. 두렵고 억울했고 비겁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왔다.


돌을 지나 인지 범위가 넓어진 아기는 선호가 뚜렷해졌다. 갈수록 엄마보다 아빠였다. 강렬하고 노골적으로 아빠에게 손을 뻗었다. 근력이 필요한 묵직한 일을 남편이 도맡으면서 의존도가 그쪽으로 실렸다. 아무리 책을 읽어주고 갖은 몸짓과 목소리로 즐거움을 주려 노력해보지만, 맛있는 음식과 목마로 환심을 사려 해봤지만 그때뿐이었다. 아기는 필사적으로 아픈 손목을 찾고 그 손에만 안기려 했다. 나는 낯뜨거운 마음으로 보조할 뿐이었다.


새카만 새벽, 무아지경으로 우는 아기를 혼자서는 도저히 가라앉힐 수 없을 때 겁먹은 표정으로 남편을 찾으며 자괴했다. 절박해보이는 순간에 도움도 되지 않는 부모여서 너무나 서운한 동시에 서러웠다. 아픈 손목에 기대는 성한 몸은 당당하게 서러워해서도 안 됐다. 서러움이 먼저인지 미안함이 먼저인지 때로 구분하기 어려웠다.


거리에서 엄지손가락 보호대나 손가락 고정 지지대를 찬 사람들을 스칠 때면 심장이 아렸다. 그 손으로 홀로 유모차를 끌고 아기띠를 매고 장을 보고 있었다. 많은 생각이 들지만 되도록 남편에게는 공유하지 않았다. 손목이 멀쩡한 나는 깁스를 한 남편에게 그런 감상이나 꺼낼 자격이 못 되니까. 저들의 남편도 아내의 손을 볼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할까, 다만 그런 생각을 한다.


배우자의 희생과 부상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육아란 원래 그런 거라고, 나중에 언젠가 이 모든 고생을 보상해주겠다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의 고생은 지켜주지 못한 부끄러움이다. 남편이 떠안은 부상 기간은 평생 민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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