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스텔라 Oct 17. 2022

돌봄을 맡긴 실수 혹은 사고

아이가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면. 그래서 치명적이라면.

오늘은 말하고 싶었다. 어제부터 말하고 싶었고 실은 수년 전부터 그랬다. 망설임은 오래 되었다. 언제든 꺼내고 싶은 과거였다.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않은 '사고'를 '과거'라고 말하는 건 불공평한 기분이다. 그 일을 나의 역사로 만드려 의도한 적이 없으니까. 그때 나는 무기력했다. 가만히 곱씹어봐도 무기력한 모습만 있을 뿐, 내가 몇 살이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아이는 다섯 살이었을까. 다섯 살의 기억치고 너무 선명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여덟 살이었을지도.


우리 엄마는 밝고 긍정적이었다. 누구든지 믿으려 했고 누구든 이해해주려 애썼다. 한밤 중에 강도가 든 어느 날에도 '그럴 수 있다' 말하며 털어내던 사람이었다. 술 취한 거구의 남자가 엄마의 목을 졸랐던 그 공포의 밤이 지나고 남자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엄마는 자신도 아들이 있는 사람이라며 사건을 덮어주었다. 참 이상하게 무딘 사람이었다. 이상하게 너그러웠다. 어쩌면 두렵고 불편한 것들로부터 어서 속히 떼어지길 바랐기 때문일지 몰랐다. 그래서 폭력 앞에 무심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옆집 오빠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동안은 기억했을 텐데 언제부터 하얗게 지워졌을지 알 수 없다. 덩치가 크거나 딱히 길쭉한 신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었지 싶다. 엄마는 사근사근한 옆집 오빠에게 어린 나를 맡겼다. 친가와 외가 모두 버스로 30분 이상 떨어져 있었으므로 엄마는 종종 나를 이웃집에 맡겼다. 시장이나 은행, 동사무소 정도의 동선에는 늘 동행했었으므로 그날은 아마 아이가 동석하기 어려운 볼일이 있었으리라. 오빠를 꽤 따랐던 모양인지 엄마의 말에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오빠가 좋아. 오빠랑 놀래!


한낮이었을 것이다. 오빠는 우리집 작은 방에서 '오빠를 정말 좋아하느냐'고 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작은 방은 낮에도 빛이 어스름했다. 오빠는 자신을 많이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오빠가 좋다고, 정말 좋다고 나는 답했다. 오빠는 네가 오줌을 어떻게 누는지 궁금한데 보여줄 수 있느냐고 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 안 된다고 말했다. 오빠가 좋았기 때문에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바지를 내려보자며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오빠는 부드럽게 졸랐다. 속삭이듯 말하는 게 조금 웃겼다. 오빠는 끈기 있게, 자신을 좋아하느냐고 묻고 나는 재차 그렇다고 답했다. 오빠는 계속 다정했다. 어디에서 오줌이 나오는지 궁금한 건데 오빠를 좋아하면 오빠한테 한번만 보여줄 수 없느냐고, 좋아하는 오빠에게 그걸 해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스스로 바지를 내렸는지 오빠가 거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오빠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의 바지를 내렸다. 바닥에 발을 붙인 채 등을 숙여 내 작은 몸 위에 몸을 포갰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세 살 터울인 우리 오빠는 그때 어디에 있었을까. 학교나 태권도학원에 가 있었으려나. 내가 학교에 다닐 나이였다면 그렇게 맡겨지진 않았을 텐데. 옆집 오빠는 겨우 너댓살인 여자아이의 입 안에 혀를 넣었고 자신의 벗은 하체를 내 아랫도리에 문질렀다. 문질렀는지 툭툭 건드렸는지 그런 디테일은 실은 기억에 없다. 포개어진 몸의 무게만 기억한다.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나를 때리거나 언성을 높히거나 힘으로 제압해 벌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인지하진 않았다. 한번은 아프다고 밀어냈는데 오빠가 차고 있던 허리띠의 버클이 내 여린 살 어딘가를 날카롭게 짓눌러서 그랬다. 오빠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내려보다가 제 허리띠를 만져보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허리띠를 풀고 다시 돌아왔다. 그동안 나는 오빠가 시키는 대로 그 자세 그대로 자리에 있었다. 우리집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곧이어 옆집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오빠는 금방 돌아왔다.


기억은 거기까지다. 그 아이가 그런 짓을 한 후에 천진한 꼬마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 엄마에게는 어떤 인사를 했을지, 그 후로 거의 매일 마주쳤을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층마다 두 개의 현관문이 마주보는 구조의 5층 빌라.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20년 넘게 살았고 그 사이 옆집은 서너번 이사를 갔다. 그 아이가 이사를 가기 직전에 일을 친 건지, 그 후로도 몇 년동안 나와 우리 가족을 마주보며 살았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까맣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절 나는 너무 어렸다.


좀 더 자라서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배웠을 때 성폭력은 극단적이고 과감했다. 추하고 음침했다. 아주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그것이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이걸 누구한테 물어볼 수 있을지도 엄두가 안 났다. 스스로 바지를 내리고 가만히 있었던 그 장면은 성행위의 현장이었지만 그것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런 걸 도대체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는 인생 최초, 최악의 추악 행위. 그 어린 애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그 작고 어린 게 더러운 걸 했어. 기억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나이가 되고부터 나는 내 안에 뱀이 살고 있다고 느꼈다. 미끈하고 냄새나는 뱀이 언제부터 살았든, 영원히 밖으로 드러나지 않길 원했다. 내가 그 뱀 자체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나보고 여우같다느니,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느니, 너무 똑똑해서 모르는 게 없고 주장이 분명한 아이라고 했다. 가족 모임에서나 이웃을 만날 때나 어디서든 그리 말했다. 나는 그런 아이여야만 했다. 똑똑하고 여우같고 고집 세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려는 아이. 그 아이가 엄마가 없을 때 안 보이는 곳에서 그런 짓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중학생 즈음이었던가. 문득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대수롭지 않게 운을 뗀 적이 있다. "엄마. 나 아기 때 성폭행 당한 거 같은데." 그러자 엄마는 더욱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핀잔했다. "얘 봐라? 니가 어떤 애였는데. 누가 니 몸에 손이나 대도록 내버려 뒀을 것 같아? 누구 하나 손가락 하나 그냥 못 댔어. 말도 되는 소리!" 어이 없다는 듯 입가에 실소가 흘렀다.


어떤 아이였는지가 중요했을까. 바로 옆집, 이웃에 나를 성폭행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가 어떤 성격의 꼬맹이였는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엄마의 말은 그 무엇보다 내가 누구였는지가 중요한 것처럼 들렸다.


성폭력의 단어를 알고 음침한 행위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난 후에도 그 사람을 마주보며 살아야 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형태로 살아가고 있을까. 옆집을 스쳐간 가정은 몇 되지 않는데도 그 남자아이의 이름을 깡그리 잊게 된 건 어찌된 일일까. 가만히 낡아지도록 지워낸 장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그 아이가 교복을 입고 있었던 것만 겨우 기억할 뿐이다. 그마저도 벨트 버클에 찔린 맨살의 고통이 강렬했기 때문이고.


엄마 있잖아. 누가 내 몸에 손 대도록 내버려 뒀어. 여러번 고개를 내젓고 안 된다고는 했는데... 그 와중에 잘보이려고 배시시 웃기까지 한 것 같기도 해. 싫어! 안 돼! 이런 말은 도대체 어떤 때에 그렇게 쉽게 나오는 거지? 입기 싫은 옷을 입어야 하거나 맛 없는 음식을 강요 받을 땐 똑 부러지게 말하기 쉬운데. 내 몸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잘-하는 건 어떤 거지? 엄마... 근데 엄마도 교복 입는 십대 남자아이한테 아기를 맡기는 일이 이렇게 위험한 일일 줄은 몰랐잖아.


사실 엄마의 무심함이 나를 그런 위험에 빠뜨린 거라고 욕하고 싶은 날도 있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엄마의 육아, 엄마의 인생, 그날 엄마가 취할 수 있었던 선택지를 그려보곤 한다. 분명 엄마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미 얼굴을 트고 사는 옆집 친절한 아이에게 내 자녀를 잠시 맡기는 일은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범죄를 방지할 여지가 있다면, 그건 어른의 몫이지 아이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나는 잘 알고 있다. 말 못할 사건이 지나간 것이 당한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격하게 안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 상처에 대해 생각한다. 받았을 상처와 받게 될 상처에 대하여. 그리고 내 상처를 나눠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 기억을 남편과 나누고 기꺼이 재료로 쓰고 싶었다. 내 아이와 타인의 아이를 지키는 방법을 면밀하게 따져 고민하고 실천하고 싶었다. 세상 가장 여리고 보드랍고 무지하고 친절하고 사랑스럽고 무해하고 취약한 나의 아기에게, 찰나의 일부라도 도움이 되려는 간절함으로. 혹은 어느 훗날 너의 범죄를 막는 굳건한 벽이 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남편에게 오늘은 말하고 싶다. 어제부터 말하고 싶었고 실은 수년 전부터 매일매일 그랬다. 한번도 적절한 타이밍이 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날의 기억을 말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테지만. 작정한 말보다 서둘러 채워진 무게로 침수한 30년 전의 장면. 내 안의 뱀을 죽이는 일은 기억의 문을 여는 것에서 시작될 것임에도. 내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병역의무보다 잔혹한 7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