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법의 말 '웬만하면'!
이제부터 고기를 먹지 않겠다! 선언을 한 지 2년이 지났다. 평생 불가능한 일이고 마음먹을 일조차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주기적으로 치킨을 먹어줘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고기를 먹지 않기를 마음먹고 나서, ‘그런 사람’을 부르는 말이 굉장히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닭알과 소젖까지 먹는 락토-오보, 물살이를 먹는 페스코, 때때로 고기를 먹는 플렉시테리언, 어떠한 동물성 제품도 소비하지 않는 비건까지. 모든 것이 처음인 나에게는 꼭 외계어 같았다. 나는 스스로를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기를 먹지 않은 초반 3개월은 완전한 비건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애매모호한 사람이 되었다. 고기를 먹는 것을 지양하지만 나도 모르게 주문한 요리에 고기가 나올 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고기를 남기겠지만 나는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조금 더 우선인 사람이라 고기를 먹는다 (물론 언제나 빚지는 마음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기존의 분류 체계로는 나는 그냥 육식인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나는 육식인, 어쩔 땐 스스로를 페스코로 소개하다가, 그러다가도 비건 지향인이 되기도 했다. 그에 따라 비건 요리를 업데이트 하는 내 인스타그램 계정 프로필도 수시로 바뀌었다. 그마저도 기존의 채식 단계는 종차별적이고, (인스타그램 @knu.vegin 참고) 나의 실천 방향을 담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그만 두었다.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비건 지향인이라고 하기에는 완벽하게 비건 식단을 수행하는 사람들과 나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직접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환경권도 조금, 동물권도 조금, 건강도 조금, 그리고 소심한 성격에 단호히 거절하지 못하는 성향도 조금 담은 단어가 애매모호한 내게는 필요했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이후 누군가를 만나서 내가 어떤 식사를 지향하고 있는 지를 설명할 때면, “누군가를 만나고 할 때는 어쩔 수 없다면 해산물은 간혹 먹기도 하구요. 만약 음식을 모르고 시켰는데 고기가 나오면 그건 남기지 않고 먹기도 해요. 그래도 그건 정말 가끔으로 두고 웬만하면 비건식으로 먹으려고 해요.”라고 했다. 앞의 말이 이러쿵저러쿵 달라져도 ‘웬만하면 비건’이라는 말은 꼭 끝에 붙곤 했다. 유레카-! 이것이야말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다.
이리저리 휘둘리고 때로는 실패하기는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채소 밥상을 차리는, ‘웬만하면’ 비건을 실천하려는 나. 플렉시테리언이라고 하기에는 남들이 이해하기에 어렵고 또 flexible하다는 단어는 어쩐지 내게 해이해지는 여지를 남겨 두는 것 같아 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 나는 ‘웬만하면 비건’인 것이다. 2년 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나를 설명하고 싶었 말을 끙끙거리며 찾았던 나는 ‘웬만하면 비건’이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여주고서 희대의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혼자 마음이 쿵쿵거렸다. 이제 앞으로는 나를 웬만하면 비건이라고 소개하고, 나와 같은 동료들을 만들어갈 수 있겠지.
나는 말의 강력한 힘을 믿는다. 나를 완벽히 설명하는 이 단어를 만남으로써 나는 또 든든한 마음으로 뿌리를 내리고 또 나와 닮은 여러 뿌리들과 얽히고 설켜 더욱 튼튼하게 우뚝 설 수 있겠지.
이 세상의 웬만하면 비건들, 소리 질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