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척 소심한 성격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모두 좋다 말했다. 수줍음이 너무 많은 데다가 내향적인 성격이라 늘 새 학기가 두려운 아이였다. 어릴 땐 식당에서 ‘저기요’ 하는 것도 마음을 꾹 먹고 해야 했다.
성인이 되고서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용기는 부족했다. 거절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고 내 주장을 내세우는 일도 그랬다. 천성이라 생각했고, 나는 영원히 바뀔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웃기게도 그 소심한 내가 이제는 조금 단호한 태도를 갖추게 되었는데 그게 모두 채소 생활 덕분이란 거다.
‘아니, 도대체 채식하는 거랑 성격이랑 무슨 상관이야?’ 하겠지만 나에겐 변화가 있었다. 채소 생활을 하는 것이 소심한 나에게는 녹록지 않았다. 초반에는 주변인들에게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선언을 하는 것도 유난으로 보일까 생각도 들었다. “고기가 들어가나요?”라고 점원에게 묻는 일은 꼭 귀찮아 할 것 같아 조심스러웠고 비건이라고 하는 것에 “유제품도 아예 안 들어가나요?”라고 재확인하는 것은 스스로 까다로운 고객이라고 비칠까 두려웠다.
쓰레기 줄이는 생활을 시작하면서는 비닐봉지는 빼고 주세요, 포장 없이 그냥 주세요. 라고도 말해야 했다. 때로는 나의 요청을 묵살하고 (양념이 샐 것이라는 등의 고객을 위하는 이유였지만) 마음대로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것을 그냥 받기도 했다. 때로는 입만 뻐끔거리다 실패하기도 했고, 왜인지 나에게 이유를 따지고 들 것 같아서 지레 포기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비건인들에게 험난한 땅에서 채소 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 문턱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려와 오지랖 그 사이 어딘가, 친절과 무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는 그 대화들에서 나는 나의 뜻을 관철해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몇 번 마음 먹고 내 의견을 강력히 피력해 보았더니 그게 익숙해졌다. 늘 좋은 게 좋다는 말로 늘 상대에게 나의 선택권을 넘겨주었던 내가, 이제는 꽤 능숙하게 거절하고 또 떳떳이 고기 말고 다른 거 먹자고 말한다. 비닐봉지에 넣지 말고 달라는 말에 “에이 아가씨, 그러면 안 돼~”라고 하는 말에 “괜찮아요. 그냥 주세요.”라고 한마디 더 덧붙일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물렁물렁 순두부처럼 살던 내가 아직 비록 짱돌은 되지 못했지만, 단단한 손두부 정도로는 성장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