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사고가 났다. 사고는 말 그대로 '사고'였다. 몇 번을 겪어도 진정되지 않고, 적응되지 않을, 불시에 닥치는 사고. 아빠는 다시 운전대를 잡기 힘들 정도로 당황해하셨지만, 끝내 내게 '여기로 와 달라'는 말 한 마디를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사고 현장에서도 나를 배려하려는 아빠를, 나는 배려하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그러한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미안해하고 탓하는 관계. 나는 아빠께 괜찮냐고 묻기 전에 다그쳤고, 아빠는 사고 순간에도 내 상황을 염려하고 우려했다.
결국 사고는 일단락되었고, 현장으로 가서 아빠를 모시고 오긴 했지만... 아빠가 택시로 10분 남짓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내게, 사고 현장으로 와 달라는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는 것. 그 사실이 내게는 진득하게 남아버렸다. 지독한 고독에서 홀로 손발을 떨었을 아빠에게, 나는 그 고독이 응당하다고 고했다.
증오하는 형제에게 마음속으로 골백번 이렇게 말했었다. 나중에 부모님께 가장 죄스러워하며 땅을 치고 후회할 이는 누구겠냐고. 그 질문의 화살촉이 향하는 곳을, 나는 오늘 응시했다. 의지할 수 없는, 위로받을 수조차 없는 자식. 나였다.
가족을 뿌리치는 일이, 그로부터 독립하는 일이 지성의 덕목이라 생각했던 내가, 부질없어졌다. 나는 가족을 무어라 생각했던 걸까. 의지할 수는 있지만 의지되고 싶지는 않았던 내 이기심을 직면하며, 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고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이용하는 이기적인 개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한다.
나는 가부장에게 끝없이 책임을 추궁했다. 실패한 가부장의 언어는 빼앗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외쳤다. 그러나 나의 가부장 역시, 시대와 사회를 거스를 수 없는 한낱 개인이었음을. 가부장이라는 기표에 왜 나는 우리 아빠를 일대일 대응하는 기의라 생각했을까. 가부장 역할 안에 억압된 개인을, 나는 왜 외면했던 것일까.
개인의 역사는 차치한 채, 사회를 개인에게 덧씌운 나의 논지들이 실은 얼마나 부당한 것이었을까. 나는 기호 속에 존재를 가두었다. 사회를 개인에게 덧씌웠다. 당신에게 추궁했던 당신네의 혐의. 당신네가 만든 논리 속에 내가 포박되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 또한 '당신네'의 모든 짐을 짊어질 수 없는 나약한 개인이었음을, 나는 알고도 모른 척했다.
아빠라는 호칭을 떼어내고, 연약한 인간으로 바라본다. 그간의 내 독설들이 그를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억울하게 만들었을까, 되짚는다. 가부장이라는 기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에게, 가부장이라는 기호만으로 존재할 것을 요구했던 내 언어가 들린다. 그간 우리 사이를 잠식했던 나의 독설들이 나를 향해 날을 세운다.
삶은 참 부당하다. 오독되고 곡해된 존재들에게는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언어가 주어지더라도, 오독되고 곡해되었던 순간을 금세 잊은 채 또 다른 존재를 포박하는 언어를 낳기 때문이다. 서러운 이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막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