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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영 Sep 16. 2022

인권적으로 ‘지원’할 때 ‘좋은 일’은 완성된다.

한국사회복지사협회 전문잡지 "월간 [소셜워커]" 별의 별 이야기 9월호


사회복지사는 좋은 일을 하는 직업?

“무슨 일 하세요?”

“사회복지사입니다.”

“좋은 일 하시네요”

처음 마주치는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 질문은 매번 이렇게 연결되고 마무리 지어진다. 관성적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나면, 나는 늘 나만의 의문에 싸인다. 그 ‘좋은 일’ 때문이다.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장애인을 지원하는 일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어 나의 일을 ‘좋은 일’이라 존중하며 칭찬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복지사의 일이, 비장애인에게는 ‘베풂’‘나눔’‘시혜’ 정도의 의미가 함축된 오래된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관념적 대답일 뿐일까? 그렇다면 나는 ‘좋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일까? 내가 하는 일이 ‘장애인’ 그들에게 정말 ‘좋은 일’이 되려면 나는 어떤 사회복지사가 되어있어야 할까?     

나는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일하는 생활지도원이다. 내가 하는 업무는 이용인의 생활 전반을 지원하는 일이다. 이용인의 생활 지원은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서비스 지원의 깊이에 있어서는 적절한 지원이 들어가야 ‘좋은 지원’이 된다고 생각한다. 즉 ‘좋은 일’도 무턱대고 하면 오히려 ‘나쁜 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일이라고 모든 것을 다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용인들에게 주는 서비스에 ‘최대지원’을 지양한다. ‘최대지원’을 하는 것이 표면적으로 보면 진정 힘써 일하는 사회복지사 같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아닐 때가 많다. ‘최대지원’이란 말은 이들을 그저 약자로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존재적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이들은 각자 나름의 자기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생활에서 이들이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에 개입하여 지원해야 ‘좋은 지원’이 될 수 있다.     

“기어서 이동이 가능하다면, 휠체어를 굳이 태우지 않아야 하고, 대변 실수가 있더라도 변의에 대한 의사표현이 가능하다면 기저귀를 착용하지 말아야 한다. 식사 시 많이 흘리더라도 스스로 숟가락질을 할 수 있다면, 사회복지사는 밥을 떠먹이는 역할이 아닌, 식사 장소를 정리하는 것이 그 역할이 되어야 한다.”

즉, 사회복지사의 역할은 시설의 운영자, 사회복지사의 결정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과 ‘의사’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장애인’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의사소통이 어렵다면, 세밀한 관찰을 통해 그들에게 지원할 영역을 설정하고 그 범위에 맞는 지원을 하도록 결정되어야 한다.)     

통상 ‘장애인 거주 사회복지시설’ 이용인의 지원은 ‘최대지원’으로 그 가이드라인을 잡고 계획한다. 이들의 능력치에 대한 개인적인 고려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시설의 운영정책에 따라 정해진 활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시설운영자 측은 그래야지만 이들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원칙으로, 이들을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사회복지사의 업무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지원계획은 앞으로의 ‘탈시설화’나 ‘지역사회로의 통합’이라는 시대적 목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좋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라면, 장기적인 관점으로 현재를 계획하는 ‘민첩함’과 사회적으로 대두되고 있는‘장애 인권’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갖춰야 한다. 사회복지 실천 현장에서 사회복지사는 ‘이용인’ 그들의 능력과 욕구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최대한 보장하고 대변해 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좋은 일은 그들의 인권을 존중할 때 완성된다

인권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주관적이라 어디다 붙이느냐에 따라 ‘존중’ 일수도 있고 ‘침해’ 일수도 있다. 그들을 위한다고 했던 나의 지원도 그들의 결정에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면 ‘비인권적’인 행동일 수 있다.     

사회복지사는 장애인 이용인에게 개별적 맞춤 지원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문가이다. 이들의 ‘인권’에 대한 존중을 사회복지사 개인의 “짠~”한 감정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불쌍해서’, ‘자식 같아서’, ‘내 가족이라면’이라고 생각하며 사회복지사의 사적인 감정으로 이용인에게 접근하게 된다면, 때로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지원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이것은 그들의 ‘자기결정’을 무시하고 사회복지사 혼자 결정하고 실행하게 되어 오히려 이들에게는‘인권침해’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이용인을 향한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비장애인’의 이기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삶을 잘 영위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하고, 사회복지사는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존중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짠~”한 감정으로 그들을 지원하게 될 때, 그것은 ‘시혜’가 될 뿐이다. 그들은 사회복지사의 사적인 감정으로 ‘도와줘야’하는 대상이 아니다. 사회복지사는 그들의 필요한 부분을 ‘지원’하는 전문가이다.

그들에게 보내는 사회복지사의 사적인 감정이 있다면 그들의 삶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 존중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서’, ‘지원받을 권리를 받음에 있어 그 지원자에게 고마움을 표현해 줌으로’ 등이 될 것이다. 

모두가 인격적 존재이고, 누구나 자신의 고유한 능력과 역할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지원 부분에 전문가로서 해야 할 역할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먼저 실천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좋은 일은 그들의 욕구와 권리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장애인’ 그들의 입장과 욕구를 가장 가까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 역시 사회복지 현장의 ‘사회복지사’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하철 시위도 ’(교통 장애를 유발시켰다는 면에서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지만, 그들은 평생을 교통약자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사회는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고 그 누구도 자기 일이 아니라며 관심밖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정적이고 냉혹한 시선이라도 받아 이를 알려야 했다.) ‘탈시설화’(이들을 획기적으로 관리 통제한다는 면에서 ‘시설’은 매우 효용적일 수 있으나, 각자의‘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권리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이다.)도 제일 먼저 장애인을 대변해 외치고 발 벗고 나가야 하는 사람이 사회복지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서 가장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회복지사’인 우리도 ‘나의’ 직장의 안정적 고용에 대한 불안감으로 ‘장애인 탈시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분위기가 제법 있다.

그래서 ‘탈시설’을 외치는 사람은 장애인 당사자와 일부 인권단체 일부일 뿐 사회적인 관심이 턱없이 부족하고, 이로 인해 사회적인 ‘탈시설 인프라’ 마련의 진척이 더디다.     

그러나 프레임을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그런 걱정 또한 기우에 그치지 않는다. 장애인이 지역사회로 나아가 비장애인과 함께 살게 되더라도 우리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복지사로서의 전문적인‘지원’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이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장기적인 골칫거리인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또한 장애인의 삶이 보장된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서 우리 모두의 인권이 보장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약자로 분류되는 최전선에 있는 사람의 삶이 인권적으로 보장되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회이자 사회복지사의 ‘좋은 일’이 완성되는 시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복지사들은 장애인의 ‘인권’과 ‘권리’를 지역사회에 알리고 이해시켜야 하는 역할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한국사회복지사협회 사회복지사전문잡지 "월간 [소셜워커]" 9월호 '별의별이야기'에 소개된 글입니다.



월간 '소셜워커'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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