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영 Nov 25. 2022

‘장애인’도 함께 하는 ‘백년지대계’ 교육계획

한국사회복지사협회 전문잡지 "월간[소셜워커]" 별의별 이야기 11월호


내 어릴 적 꿈은 밋밋하고 지겨운 나의 일상에, 이벤트 같은 무슨 일이 생겨주는 것이었다. 매일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집으로 오는 일상 속에서 나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고 싶었던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장애’라는 특별한 이벤트를 가지고부터, 나의 꿈은‘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순탄한 하루가 지나가면 “그래, 오늘도 별일 없었다”라며 스스로 한숨 섞인 위로를 했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나는 늘 ‘5분대기조’가 되어야 했다. 학교에서 아이가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날에는 어김없이 학교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뛰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4학년쯤이 되자 학교에서는 특수학교와 대안학교 이야기를 꺼내며 아이를 전학시키길 바랐다.

‘장애’를 가졌다고 ‘비장애’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다닐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 ‘장애’는 오로지 가족만이 책임져야 할 영역일까?

오랜 생각 끝에 나는 전교생의 수가 작고, 도심에서 떨어진 학교로 큰아이를 전학시켰다. 그곳은 대안학교도, 특수학교도 아니었지만 아이는 그곳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해 주었다. 결국 학교장과 선생님들의 장애관이 아이를 이상하게도, 그저 특별하게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점이었다.     

일반학교 선생님들의 부족한 장애인식

내가 일반고등학교의 특수반(도움반)에서 특수교육실무사로 일할 때였다. 어느 날, 특수반 학생의 통합반 담임선생님이 몹시 화가 나, 아이를 데리고 와서 나에게 말을 꺼냈다.

“내가 말을 하는데, 선생님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 말을 무시한다”

그런데 그 아이는 심한 자폐장애를 갖고 있었다. 자폐장애의 특성을 조금만 안다면, 그 아이가 왜 선생님의 눈을 보지 않고 있었는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통합반 선생님들은 흔히 장애학생이 문제행동을 보이면 “약은 먹고 있어요?”, “치료는 받아요?”라는 질문을 한다. 즉, 장애를 ‘병’으로 보고 ‘치료’의 영역으로 두는 그릇된 ‘장애관’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런 말을 아이들의 교육을 전담하는 전문가가 뱉는 것을 보면, 우리사회의 교사양성에도 문제점이 많아 보인다.

교사임용시험은 어려운 문제를 한둘 섞어놓고 틀리길 유도하며, 그것이 변별력을 가리는 문제로 둔갑하여, 그 변별력을 통과한 사람을 선생님이라는 자리에 앉히는 과정이다. 즉, 선생님의 자질과 인성 그리고 교육마인드 등을 가려내는 구조적인 절차가 부족해 보인다.     

현재 일반학교에서의 장애인의 위치

우리가 비장애 아동의 특성과 적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그들의 가진 소질과 능력을 이끌어주듯, 장애아동에게도 그들의 장애영역을 인정하면서, 그들만의 타고난 기질을 존중해 줄 수 있는 방향으로 통합교육을 이끌어 나갈 수는 없을까? 학교의 이러한 반응과 사회적인 시선으로 ‘장애’를 가진 부모들은 더이상 학교와 선생님에게 폐 끼치지 않는 아이를 만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치료실을 전전해 본 부모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 아이가 학교에서 원하는 만큼의 변화가 없으면 더 많은 치료를 대입하거나 더 큰돈을 들여 좋다고 소문난 치료실을 알아보러 다니고, 또 다른 병원을 찾아가 갖가지 약을 복용시켜본다.

즉 아이의 장애 성향이 무엇인지, 본래 가진 기질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지 못하고 사회적인 관점으로 치료해야 되는 대상으로 생각하며 병이 낫듯 그들의 타고난 본성과 기질을 바꾸는 데만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 현재 일반학교의 장애학생에 대한 태도이다.     

장애인의 특성과 기질을 존중하는 통합교육

장애아이의 장애를 소거시키는 데에만 몰두하지 않고, 이들과 함께 생활할수 있는 환경조성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 소리에 예민한 반응을 가진 자폐장애 아이가 있다고 하자. 환경에 예민한 자폐장애 아이의 성향을 미리 알고 대처한다면, 이 아이의 소위 일컫는 ‘문제행동’은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다.

이들은 흥겹게 듣는 음악 소리는 천둥소리로, 소곤소곤 거리는 말소리는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처럼 들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아이를 조금 개인적인 공간, 즉 교실의 맨 뒤 구석에 책상을 둘 수도 있고, 음악 시간에는 대체 교육을 시킬 수도 있다.

즉, 장애에 대한 이해와 조금의 배려만 있다면 이들의 문제행동은 문제행동이 아닌, 그저 이들의 특성이며 기질로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교육자의 시선이 ‘비장애 형제’라는 ‘낙인’을 만든다.

장애아이를 둔 부모인 나는, 이처럼 내 아이의 사회적응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장애인 형제자매를 둔 비장애 형제자매의 어려움이다. 큰아이(장애인)가 어느 정도 사회적응을 시작할 무렵, 둘째 아이(비장애 형제)의 사춘기가 시작되었는데, 그때서야 그 아이의 설움을 돌아보게 되었다.

장애 형제를 바라보는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알게 되면서 이에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반대로 형제의 장애를 부끄럽게 여기며 남들 앞에서 장애형제의 존재를 숨기게 되기도 합니다. 가끔은 장애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가족에 대한 연민으로 괴로워하기도 하죠.(‘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비장애현제 자조모임 ‘나는’ 글)     

둘째 아이 역시 나 못지않은 불안감이 늘 있었고, 학교(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와 집에서 자신은 항상 장애 형제가 되어 있어야 했다. 아이는 친구들이 흔히 실수하면 내뱉는 “너 장애인이냐?”라는 말에 늘 마음이 뜨끔 했다고 이야기하며, 본인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항상 형의 동생으로 지적받으며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지 나에게 물었다.

이처럼 형의 장애로 인해 본인도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을, 스스로 견디며 지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장애아이에 대한 편견은 비단 장애아이 한 명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의 분위기에 따라 비장애형제 자매들에게도 편견과 차별의 사회적 시선이 따라오고 있음을 알고, 이것에 대한 교육적인 대책 마련도 시급함을 느꼈다.

즉, 장애인의 형제자매로서 낙인된 시선을 거두고, 그저 그 아이만의 개성과 성격을 고려하여 바라봐 주는 선생님의 역할이 절실히 요구되는 부분이다. 또한 장애는 가족만이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비밀이 아닌, 우리가 함께 서로 돕고 생활하는 사회 구성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교육을 받을 시점부터, 피교육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비장애 완전 통합교육에 답이 있다

올바른 장애인식의 첫걸음은 장애, 비장애 완전 통합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애아이의 안전한 통합교육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선생님들의 전문적인 장애에 대한 이해와 비차별적인 시선이 선행될 때 가능하다. 선생님의 전공과목을 상위하여, 교육자로서 비장애 아동의 교육학을 연구하고 공부하듯 장애아이의 특성을 알고 이해하는 과정의 확대가 절실히 요구된다.

“장애아이만 따로 모아놓고 교육해”라고 하는 것은 구시대의 차별적 발언이다. 그렇게 교육받은 비장애인 역시 장애인 친구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고, 그것은 나아가 장애 차별적인 시선을 심어주는 교육이 된다.

따라서 장애 비장애 통합교육의 우선 첫걸음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부터의 통합교육을 추진하는 것으로 본다. 이 과정에서 현재 특수학교의 특수교사와 거대 장애인시설의 사회복지사가 분산 배치되어 이들의 교육과 생활요소적인 부분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설계하게 한다면, 장애 비장애 아이들 모두, 적절한 교육환경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현재 출산율 저하로 고용 창출이 사회적인 과제로 남아있는데, 모든 어린이집과 유치원 그리고 공교육의 학교에 특수교육실무사(특수아동들을 위한 교내활동 및 교육을 지원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사람)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실무자를 투입한다면, 이 과제의 해결책도 일정부분은 마련될 수 있다고 본다.

아직 편견이라는 주변의 시선이나 고정된 관념이 주입되기 이전에, 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교육받게 된다면 장애인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의 교육계획에 혹시 장애아이는 빼놓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가장 기본적인 해결책장애인 탈시설화

또한 다른 해결책으로는 우선 장애인 탈시설화 추진이다. 그곳의 장애인들이 각자의 가정환경으로 자립하거나, 최소한 그룹홈의 개념으로라도 지역사회로 들어와 생활해야 한다. (탈시설이란 이들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의 주체적인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은 어디에도 장애인을 접할 기회가 전무하다. 기껏해야 도로에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가는 장애인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옆집에 장애인이 살고, 이들과 함께 마트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반상회에도 함께 참여하는 등 우리 생활영역 안에 장애인의 생활영역이 교집합 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장애인의 삶이 어디 먼 곳에 있는 특별한 공간이 아닌, 우리와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동질 한 주민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될 것이고, 이것을 우리의 아들, 딸들이 보고 느끼며 성장하게 될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다. 이 아이에 장애아이와 비장애 형제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나 깊이 생각해 본다.            



나는(Its about me!)’ 

누구에게도 쉽게 이해받을 수 없었던 비장애 형제가 함께 모이면 깊은 공감을 통해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비장애 형제 스스로 자신을 돕고자 만든 모임, 우리 사회에 비장애 형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강연 등의 활동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으며, 장애 가정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와 콘텐츠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홈페이지 nanun.org

이메일 

nanun.teatime@gmail.com

페이스북 http://www. facebook.com/naun.teatime/

트위터 @nanun_teatime

인스타그램 @nanun_teatime

-한국사회복지사협회 사회복지사전문잡지

"월간[소셜워커]" 11월호 '별의별이야기'에 소개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장애인’은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