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제목은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의 첫 문장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위하다'라는 말은 따뜻한 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없다는 말과 나란히 쓰인 문장은 어딘가 서글프고 서늘한 느낌이 풍겨져 나왔다.
1980년대 베트남 참전 용사였던 모스는 텍사스의 인적 드문 사막에서 마약과 연루된 거액의 돈 가방을 챙긴다. 그 순간 이후부터 킬러 안톤 시거의 살벌한 추격전이 시작된다. 피를 싫어하는 킬러 시거는 추격전 도중 거슬리는 사람을 서슴없이 죽여버린다. 늘 한 템포 늦게 선혈이 낭자한 현장을 뒤쫓는 60대 보안관 벨의 독백으로 소설은 시작되고 끝난다.
벨의 독백이 없었더라면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했으리라. 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장부호마저 생략되어 거친 사막처럼 건조한 문체, 더군다나 소설 속 내용은 감정과 인정이 삭제되어 지나칠 정도로 잔인하고 폭력적이라 책을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비정함에 몸을 떨어야 했다.
인과관계없이 닥치는 대로 살인을 일삼는 악의 화신 킬러 시거의 캐릭터가 주는 파장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코엔 형제가 감독을 맡은 영화는 이 어마 무시한 소설을 영상으로 그려내었다. 특히 시거 역을 맡은 하비에르 바르뎀의 단발머리와 표정은 정말 경악할 만큼 무섭고도 우스웠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바로 전 읽은 작품, [모두 다 예쁜 말들]의 영화의 여주인공 페넬로페 크루즈의 남편이었다)
안톤 시거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을 악마, 불사조, 냉혈한이었다. 인간이 아닌 살인기계라 여기는 편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런 그에게는 그만의 원칙과 소신이 있다는 것이 더 씁쓸했다.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살인에 앞서 내뱉는 말들이 또 나름 철학적이라 딱히 부인할 수도 없다.
인생은 매 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구나 없지.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282쪽. 모드의 부인(칼라진)을 죽이기 앞서
이 불가사의한 캐릭터가 사람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작가 코맥 매카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킬러 시거는 바로 자본과 물질로 철갑이 된 몰인정하고, 각박한 지금의 시류를 대변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자,
지난 시대의 가치와 상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살아온 시간의 기억과 경험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노인들에게는 세상은 더 이상 다정하지 않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코로나 이후 골목골목 작은 간판이 내려지거나, 바뀐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자본에 밀리고 경쟁에 치여 내동댕이 쳐지고 마는 것이다.
총소리와 핏자국만 없지 어느 가족의 숨통이 끊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은 거짓말도 하지 않고, 쉬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눈물도 없다. 안톤 시거처럼
코맥 매카시의 작품 속의 미국은 배신의 아이콘이다. 침탈과 침략의 역사 위에 질식사한 국민들의 아우성을 말한다.
전쟁의 광풍 속에서 살아 돌아온 그들 뒤에 나라가 없었으며, 나라는 조각조각 갈라졌다고 말한다.
벨은 2차 세계대전, 모스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나라의 거대한 빚을 인생에 짊어지고 살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세상은 관대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았다.
특히 노인이 된 보안관 벨은 [무례]함이 용납되는 세상, [상식]이 통하지 않은 이 시대에 대해 개탄한다.
세상은 날로 발전하고, 날로 편해지는 동시에 온갖 탐욕과 범죄에 물들고 있지만 아무도 어쩌지 못하는 세상은 종말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하고 죽음보다 더 비통한 패배감을 맛본다.
노인의 삶은 그 사람만의 고유한 생이기도 하지만, 한 시대의 생이기도 하다.
이전 세대의 삶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후 세대는 노인이 살아온 시간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누구나 노인이 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모여서 인생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이 세상에서 절대로 보기 힘든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넝쿨째 굴러다니는 행운이야
258쪽, 우연한 행운으로 돈다발을 주웠지만 쫓기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 모스
이 작품에서는 인물들을 통해 우연과 행운과 불운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꽤 여러 번 있다.
안톤 시거는 동전 던지기로 다른 이의 행운과 불운 아니, 생사를 결정짓는다.
어쩌면 사람은 태어나는 것 자체가 행운이고, 그 이후는 불운을 직접 마주하거나 살짝 피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닐까?
살다 보면, 행운이라고 느끼는 날보다 휴~ 하고 불운을 피한 것을 다행이라고 느끼는 날이 더 많았지 싶다.
그런 날이면 생각나는 시가 있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났다,
지난주 친정집에서 이른바 만두 데이를 가졌다.
친정 엄마가 묵은 김장김치로 만두소를 만들어주시면 친구들과 만두를 빚어 먹는 날이다.
친구 3명은 엄마가 이미 돌아가셨고, 1명은 너무 멀리 계신 탓에 가끔 엄마가 해 주던 음식을 고파해서 행사(?)를 기획하게 되었다.
엄마 정 나누기 미션 ^^
하루 종일 친정집에는 전에 없던 온기로 가득하다.
연신 쪄대는 찜통의 온기와는 별도로 사람 사는 냄새가 흠씬 난다.
대략 500개 정도 만두를 만들면서 수다도 떨고, 하이볼도 만들어 마시고, 터진 만두도 주워 먹고, 하루 종일 잔치 분위기였다.
아들 같은 딸 노릇을 하느라 평소 싹싹하지도 않고, 이쁜 소리도 못하는 나와 달리 친구들은 우리 엄마에게 더없이 곰살맞은 딸 노릇을 한다.
맛있다는 리액션, 고우시다는 빈말도, 다정히 손도 잡아주고....
엄마도 좋아하시고, 친구들도 친정에 온 것처럼 푸근해한다.
본인들 친정에 다닐 때처럼 쌀이며, 과일이며, 간식을 차에 가득 싣고 와서 내려놓고는 만두 도시락과 김치통을 대신 품에 안고 간다.
터진 만두를 호호 불어가며 배불리 먹었다지만, 수육을 삶아서 저녁으로 먹었다.
새우젓을 찾았더니 48년생 엄마는 "쿠팡"에서 주문한 새우젓을 접시에 담아 주셨다.
친구들이 놀라서 "엄마, 쿠팡에서 주문하실 줄 아세요?" 물었다.
"그럼, 쿠팡이 얼마나 좋은데... 도시락도 거기서 주문하고, 커피믹스도 주문하고"
새로운 문물에 호기심이 많은 엄마는 나보다 더 최신폰인 갤럭시 Z 플립을 사용 중이신가 하면,
지하철, 버스 앱을 다운로드해 시간 맞춰 이용 중이시고,
밴드를 통해 모임 투표도 하시고,
유튜브를 보고 요리를 하고, 뜨개질을 하시고,
대형마트가 오픈하면 꼭 오픈에 구경을 가시고,
새로운 지하철 노선이 개통하면 공연히 타러 가신다.
얼마 전까지 사실 엄마를 오해했다.
일찍 돌아가신 아빠의 울타리 안에서 사시느라 아무것도 모르시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다.
그러나 어언 30년, 그 세월 속에서 세상은 변해왔고, 엄마는 적응을 넘어 진화했다.
친구들이 처음 기억하는 30대의 엄마는 이제 70대의 노인으로 살아가시지만, 노인으로 머물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앞으로 보고 배워야 할 것은 김치 담그고, 만두소 만드는 거 말고도 엄마의 호기심과 열정과 도전이며 이는 엄마가 물려주실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만두는 특별히 맛있다며, 쿠팡에서 주문한 새우젓도 대박이었다고 친구들 단톡이 불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