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를 시작으로
1990년 지방 소도시에서 고등학생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곳은 고작 시내 극장이 전부였다. 주입식 교육, 입시 위주의 교육에 십 대의 꿈과 감수성을 몽땅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그 당시 영화관에서 상영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날은 내 인생의 일대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50년대 미국 명문 사립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성적 지상주의와 획일화된 교육제도를 비판하며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한 영화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꿈을 향해 자신만의 걸음으로 걸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성장을 다룬 영화 중 단연 명작이다.
“카르페디엠”을 외치던 키팅 선생님, 본인 역시 엘리트 출신이었지만, 그 길보다 더 중요하고 행복한 길을 알려주려 애쓰던 모습을 통해 입시 위주의 냉혹한 평가에 주눅 들었던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FM에서 나오는 음악과 책으로 사춘기 시절을 달래는 것이 전부였던 내게 영화는 또 다른 세계처럼 각별하게 다가왔다. 음악과 서사를 품은 영상으로 세상을 읽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닿을 수 없지만, 절대 멀지 않은 또 다른 신대륙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거라.
어쩌면 성적을 높이는 것보다 자신만의 꿈을 키우라는 가르침을 교실에서가 아닌 극장에서 배웠을지도 모른다. 자율적으로, 자신만의 인생 목표를 세우라고 일깨워준 사람 역시 스크린 속의 여러 스승이었을지도 모른다.
내성적이고 유약했던 토드가 진실로 자유로운 삶을 향해 용기 내어 누구보다 먼저 책상 위로 올라가 oh captain, my captain을 외치던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지금껏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토드는 나만의 친구가 되었다. 에단 호크가 토드를 발판 삼아 배우, 감독, 각본가, 작가로 자기만의 길을 향해 눈부신 성장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면서 내심 흐뭇했다. 그러는 와중에 나도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짧지 않고,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두렵고 불안할 때, 도망치고 싶을 때, 혼자일 때 그 모든 순간을 지나오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내 마음속의 토드가 나를 응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결혼 후 육아로 갇힌 세상에서 영화는 세상을 향한 열린 공간이자, 세상을 읽는 지도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짧은 순간의 마법은 영화 한 편으로도 충분하다.
세 아이를 키우고, 사교육 현장에서 20여 년 일하면서 교육 문제가 예전보다 오히려 더 악화되어 경쟁에 시달리고 지쳐있는 아이들을 때때로 만나게 된다. 감히 키팅 선생님의 눈빛과 마음으로 아이들이 진정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존중해 주며 바라봐 줄 수 있었다.
영화는 수많은 삶을 대변해 주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은 스크린에서 빠져나와 내 삶 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내게 질문을 던져주었다. 먼 나라의 과거의 어느 날 속에서 답을 찾기도 했고, 오늘을 사는 이웃들의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어쩌면 18살에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영화라는 장르에 눈뜨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삶의 모퉁이에서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힘들면 기대어 쉬어갈 수 있게 품을 내어주는 동반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직접 겪을 수 없고, 겪어보지 않은 많은 역사와 사회와 사람들을 재조명하게 해주어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일깨워주었다. 시대극, 전쟁 영화 특히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영화, 예술가들의 삶을 재조망한 영화 등등 이런 영화들을 통해 인간의 이면과 역사의 그림자들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영화는 수많은 사람의 협업으로 이루어낸 산물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열정과 영혼이 담긴 절대 가볍지 않은 주제와 질문들에 대해 사유하면서 때론 아프고, 때론 슬펐다. 하지만, 대부분은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인간, 인생의 모습들이었다. 그래서 종국엔 희망과 아름다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내 인생을 통틀어 영화를 몇 편 보았는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영화에 빚진 인생임은 틀림없다. 쉰을 넘긴 나이에 좋아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 모두가 만류하는 그러나, 나만의 길을 막 나섰기 때문이다. 이 행복은 분명 “죽은 시인의 사회”가 내게 건네준 선물이라는 것을 믿는다. 이 공부를 하는 동안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인생 영화를 추천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잠시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미약하나마 영화에 진 빚을 갚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