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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이 Jun 06. 2021

비극과 희극 사이, 기생과 공생 사이

영화 [기생충], 2019, 감독 봉준호

영화 기생충이 개봉하는 날

흉금을 터놓는 오래된 친구를 급히 호출했다.


평소 혼자도 영화를 곧잘 봤지만 이 영화는 혼자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침 친구도 꼭 보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를 보기 앞서 왠지 모를 기대와 설렘과 불안으로 긴장되었다.

다른 관객들의 얼굴에서도 기대감이 보였다.

숨죽인 관객들 사이에서 나 역시 숨을 누르며 영화를 봤다.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에서는 웃기도 했지만

보는 내내  마음이 늪에 빠져 버렸다.


"이 영화는 악인이 없으면서도 비극이고, 광대가 없는데도 희극이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영화였다.

불 꺼진 상영관 계단을 내려올 때는

몹시도 쓸쓸하고, 씁쓸하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영화가 끝나고 친구와 막상 아무 말도 나누지 못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생각과 기억들이 들이닥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내 이야기, 친구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였다.

애써 외면하고 회피했던 계급사회의 민낯

그 [불편한 진실]에 가닿은 평범한 이들의 비명은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나았다.


친구도 영화 마니아라 영화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했는데

그날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까지 영화 기생충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배려였다.


우리는 고향 친구로 어릴 적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함께 자랐다.

아버지들이 광업소 노동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세상과 인생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배웠다.


광업소에서는 호봉과 직급에 따라 사택이 배정되었다.

사는 곳이 곧 계급이었고, 가장의 직급이 곧 그 집안의 배경이 되었다.


일본식 가옥 구조로 지어진 근로자용 사택은

긴 슬레이트 지붕 아래  2~3가구가 모여 살았다.

수십 가구에 하나씩 공동 화장실과 공동 수도가 배당되었다.

관리자들은 연립이나 아파트형으로 배정되어

집 안에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주방과 수도가 있었다.


먹고, 입는 거야 취향이라 둘러댈 수 있지만

사는 곳은  내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어린 시절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 여겼다.


가장의 뼈 빠지고 등골 휘는 노동에 온 식구의 먹고사는 문제가 달려있기도 하고
그들의 목숨을 건 노동으로 회사의 운명과 나라의 국익이 좌우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처우와 대우는 어린 내 눈에도

못내 모자라고 부족해서 안타까워 화가 나고, 억울했다.


노동자들 덕분에 회사가 돌아가는 걸까?

회사가 있어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걸까?

어린 내게 풀리지 않는 숙제 중 하나였다.

 

우리나라  외화벌이의 1등 공신이었던 광산은

값싼 중국산에 밀려 사양산업으로 밀려나 폐광되었다.


아버지는 폐광 직전 병환으로 퇴사했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던 근로자들은 폐광이 되자

전국 각지로 다시 흩어졌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퇴직 전 미리 마련해 둔 집으로 이사했다.

광산촌을 벗어나 서울로 가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잠실 아파트를 사고 싶어 몇 번씩 서울을 오르락거렸다.

그러나,

20여 년 지하 갱에서 목숨 걸고 일하고,

까끌까끌한 정부미 먹어가며 아낀 돈으로 구한 집은

성남 언덕배기 그중에서도 제일 꼭대기 13평짜리 집이었다.

옥상에 올라서면 더 이상 시야를 가릴 것 없이 탁 트였지만

개미떼처럼 줄지어 있는 집들과

붉은 십자가만이 심심치 않게 보일 뿐이었다.



성남에서도 한 지붕 3가구가 같이 사는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은 안방, 거실 겸 주방, 다락을 쓰고

건넌방에는  막노동과 요구르트 배달하는 부부가 아이 둘과 살고

뒷방에는 모자가 산다고 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집안 마당에 있는 화장실과 수도, 연탄 광은 같이 써야 했다.


광업소에서 근로자들에게 사택을 배정한 것처럼

나라에서 하층민들에게 판잣집을 배정한 듯했다.


22년 광산에서 노동자로 성실히 살아온 아버지는

성남시 00동 0000번지 13평 9홉 집에 본인 이름의 문패를 달았지만

결국 그 집에서 일어나 앉아 보지도 못하고 누워있다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는 지하로 지하로 내려가야만 돈을 벌었고

가족에게 남겨둔 집은 언덕 위로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영화에서와는 반대로 우리 가족의 삶은 지하 깊은 갱도부터 언덕 꼭대기까지

수직으로 수백 미터 그 허공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오르막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도시 노동자들의 피곤한 안색들을 마주칠 때마다

무수히 들었던 감정과 생각들,

모로 누운 잔털들이 일제히 곤두선 것처럼

일상에 파고들었다.


좀 더 솔직한 속내를 고백하자면

가진 자들의 부도덕함, 모순, 탐욕, 거만함이

지울 수 없는 가난의 체취에 작은 위로가 되었었다.

한편,

가난한 이들의 성실함과 순수함이

감출 수 없는 가난한 이력의 변명이 될 거라 믿었었다.


그러나,

[기생충]을 보고 난 후부터

그 모든 생각의 기준이 깨져버렸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계급적 차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환경적, 본능적인 적응이었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계급에 맞게 길들여진 인간성에 대해

인간에 대한 예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아버지 작업복에서 났던 그 냄새

그 알 수 없었던 냄새의 근원을 알게 되었다.

서글픔이 더해졌다.


아버지와 나의 인생 이야기,

세상 많은 우리들의 이야기


장대비 쏟아지는 계단을 거슬러 올라갔던 그때,

비에 젖은 옷보다 먼저 마음이 젖어있었던 그때,

가족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접었던 쇼핑백을

길에서 마주치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던 그때,

마치 그 시절을 들킨 것처럼 영화 속 모습은 적나라했다.



봉테일이라는 별명답게 우리 사는 세상을 밀도 있게 들여다보는

그 마음과 열정과 시선에 찬사를 보낸다.


아카데미 4관왕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쓴 봉준호 감독

앞으로도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생각거리를 마구 던져주길..


그 시절을 함께 한 친구와 지금까지 못한 영화 이야기를 뒤늦게나마 나눠봐야겠다.

친구의 인생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그동안 잘 살아왔다 토닥토닥해주면서.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내가 사는 세상,

내가 살아온 인생을

때론 주인공처럼

때론 여행자처럼

느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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