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개봉한 지 오래된 영화를 넷플릭스로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난밤 본 영화는 1997년 개봉한 홍콩영화 [첨밀밀]이었다. 이 유명한 영화를 이제야 보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1997년은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해였다. 1997년 첫 아이를 낳은 후 사회에서 스스로 격리되어 고립되었다. 둘째 아이를 19개월 차이로 낳고 나서 육아 전쟁을 치르는 동안 먹고 씻고 자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몇 시간 단위로 젖병을 씻어 말리느라 늘 앞섶이 젖어있었다. 그 당시 소원은 고작 뽀송뽀송한 잠옷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일이었는데 그 소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TV는 유명 연예인이 동요에 맞춰 춤추는 화면이 종일 틀어져있었고, 각종 동물 울음소리가 쉴 새 없이 장난감에서 울려댔다. 어른 사람과 대화하는 일보다 의성어, 의태어로,흉내 내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차 오디오에서는 A, B, C, D 알파벳 송이 흘러나오는 통에 좋아하던 영화와 음악의 다정한 손을 놓쳐 버렸다.
가정과 육아라는 고독한 섬에 유배되어 살던 그 시절, 친구들과 연락도 뜸해지고, 사회와는 더욱 멀어졌다. 요즘 각종 경연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노래 중에서 도대체 들어본 적도 없고, 가수도 알 길이 없는 노래들이 있어 찾아보면 그 당시 노래들이다. 누구나 알 법한 영화들이지만 내가 못 본 영화들은 아마 그 무렵 상영된 영화들이다. 97년부터 10년 가까운 시절이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뒤늦게 보충수업 중인데 영화들은 하나같은 깊은 감동이라는 후한 점수를 선사한다.
첨밀밀의 뜻은 달콤한 꿀이다. 찬란한 꿈을 품은 두 청춘들의 젊은 날을 이야기한다. 1986년 같은 날, 중국 본토에서 기회의 땅 홍콩으로 꿈을 안고 떠나온 두 주인공이 꿈과 사랑을 찾아 헤맨 10년을 그려낸다. 개봉 당시 영화를 못 봤는데도 등려군의 영화 주제곡 [월량대표아적심]은 너무나 익숙했다.
십 대 시절 홍콩영화에 빠져 살았다. 유덕화의 거칠고 반항적인 모습에 환호를 질렀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천장지구], [열혈남아], [지존무상], [도신], [지존본색] 등등. 1500원이면 홍콩 영화를 볼 수 있던 시절이라 틈만 나면 극장으로 달려갔다. 홍콩은 영화에만 존재하는 도시 같았다. 그 시절 홍콩을 직접 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몇 년 전 홍콩을 처음 갔을 때 전혀 낯설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영화 탓이라 생각했다. 영화 속 분위기처럼 홍콩은 도시 전체가 화려함과 동시에 숨은 그늘이 느껴졌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풍겨져 나오는 헛헛함은 내 느낌만이었을까?
영화는 홍콩에서 시작되어 뉴욕의 거리에서 끝난다. 돈을 벌기 위해 대륙을 떠난 주인공들이 홍콩과 뉴욕으로 떠난 듯, 떠밀려간 듯한 이야기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홍콩의 본토반환을 앞둔 불안정한 사회 현실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대만 가수 등려군의 노래에 기대어 그 시절을 살아낸다. 만남과 이별, 엇갈림 속에서 방황하던 두 주인공이 뉴욕의 레코드 가게 앞에서 등려군의 사망 소식을 멍하니 바라보다 조우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주인공 장만옥(이요)과 여명(소군)은 내가 홍콩영화에 빠져 살던 그 시절 그대로의 얼굴이라 옛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가웠다.
대도시에서 이리저리 채이는 풋내기들의 악전고투가 분명 안쓰러운데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기도 했다.
불안한 마음과 고단한 몸으로 낯선 도시를 헤매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저당 잡힌 청춘의 시간들. 영화 속 홍콩의 청춘과 현실 속 서울의 청춘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내가 서울에 입성한 91년 그 해 봄은 유독 흐린 날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날이 흐렸다기보다는 도심의 공기에 적응하지 못해 늘 흐렸던 걸로 기억되나 보다.
나의 현실과는 다르게 화려하고 눈부신 서울이 야속했다. 남영동, 후암동, 해방촌 일대를 헤매면서 어둑해진 남산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보면 고향의 하늘과 닮아 있어 마음이 놓였고, 도심을 내려다보면 명동과 충무로의 치솟은 빌딩에 주눅 들곤 했었다.
영화 속 다양한 인연들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치열한 인생에 대한 연민과 우정과 사랑이 뒤범벅되어 한 시대를 살아내는 모습을 통해 헐벗고 위태로웠던 지난날의 내 모습과 주변이 떠올랐다.
담벼락에 기대어 아무 말없이 서로의 처지를 위로했던 친구, 고달프지만 내일에 기대어 버텨낸 시간들, 눈빛 하나로 남산을 한달음에 오르던 열정, 그 지난 시간들이 몸서리처지게 그리워졌다.
일상에 매몰되어 살다 보니 청춘은 저 멀리로 달아나버렸다. 그 청춘의 시간보다 곱절더 나이를 먹은 후 청춘 로맨스 영화를 보니
비록 얼룩진 상처뿐인 청춘이라도 꿈꾸며, 꿈을 향해 몸부림치던 그 시절이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촌스럽지만 순수한 시절,
어리숙하지만 열정이 넘치던 시절,
그 어여쁜 시간들,
청춘의 시간은 언제나 오전 10시쯤이었을 듯하다.
진가신 감독은 이 영화 [첨밀밀]로 르와르 일색이던 홍콩영화를 로맨스로 방향 전환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진가신 감독의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소년 시절의 너]로 이어지는 꼬리를 무는 영화보기는 계속된다.